두 작품 모두 서로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 어떤 사고로 인해 맞닥뜨리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라 하겠다. 물론 <기생충>의 두 가족과 <미키17>의 17,18이 바로 그 사례이다. 동시에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전자에서의 두 가족은 특정한 집단을 대표할 수 있는 데 반해 후자의 두 사람은 사실상 하나이며 어떤 집단 대표성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을 도출할 수 있는데, <기생충>은 처음에는 두 가족의 소소한(?) 아귀다툼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거대한 사회적 문제로 끓어오르는 발산적 영화인 반면, <미키17>은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 같은 거시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개인의 자아로 집중되는 수렴적 영화로 볼 수 있겠다.
영화는 미키17도 18도 아니고 '미키 반스'라는 이름을 찾으면서 끝난다. 이름이 자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다소 진부한 상징을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내내 숫자로 호칭된다는 점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포디즘으로 대표되는 현대 자본주의를 연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전체주의로 볼 여지도 있다. 실제로 작중에서 케네스 마샬이 매우 능숙하게 이용하는 미디어는 전체주의와도 한쪽 다리를 걸치고 있다. 레니 리펜슈탈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히틀러는 미디어를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제법 뜬금없이 등장하는 마약이 만일 먀살에 의해 은밀하게 유포된 것으로 가정한다면 <멋진 신세계>의 소마가 떠오르기도 한다. 원래 이쪽 끝과 저쪽 끝은 닿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냐 전체주의냐 하는 건 다소 주변적인 논쟁으로 보인다. 어쨌든 일단 고착화된 시스템은 그 안의 개인을 도구화하게 되어 있으니. 물론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자본주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하다.
미키가 이름을 찾아 가는 여정은 빨간 버튼을 두고 전개된다. 미키는 과거에 엄마가 몰던 자동차의 빨간 버튼을 잘못 눌러 큰 사고를 냈고(정확히는 그렇게 착각하고 있고) 현재 시점까지 PTSD로 남아 있다. 이 버튼은 크게 세 번 변주되는데 첫째는 미키17과 18을 원격 폭파시키기 위해 마샬이 가지고 있는 버튼이다. 둘째는 익스펜더블의 종말을 선언하기 위해 미키17이 프린터 기계를 폭파시킬 때 사용하는 버튼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미키17의 환상 속에서 일파 마샬이 맛보기를 권하는 소스 방울이 바닥에 떨어진 붉은 원형이다. 미키는 어떤 미키를 희생시킬지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고, 마샬 부부에 대한 공포를 '미키18이라면 어땠을까' 하면서 극복하고, 마침내 자아 분열의 원천을 자기 손으로 폭파시킴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샤의 존재는 매우 큰 역할을 한다. 나샤는 주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미키17에게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를 묻지 않았다.(마샬 부부가 물었는지 아닌지 가물가물한데 이들은 제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미키가 죽었다가 프린트되기를 반복하기는 하지만 각각의 미키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죽음아고, 그 질문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고 모르고는 공감 능력에 달린 것이다. 요새 공감 능력이라는 게 남용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봉준호는 <미키17>에서 공감을 인간성의 요체로 보고 있는 듯 싶다. 크리퍼들은 두 개체가 잡혀가자 모든 개체들이 그 고통을 공유하는 것처럼 한 목소리로 울부짖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소리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기생충>에서 기우네 가족의 난투극을 슬로모션으로 잡아 희비극을 연출한 것처럼, 우주선 안쪽에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바깥에서는 미키의 잘린 팔이 날아가는 순간을 슬로모션으로 포착했다. 한순간 오싹하게 다가오는 미키17의 환상은 여전히 호러 감각이 날서 있음을 증명한다. 옥자와 맥락이 비슷해 보이는 크리처 디자인과 소름끼치는 울음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작은 크리퍼들이 뭉쳐서 여러 마마크리퍼들을 만드는 장면은 화면의 역동성을 극한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익스펜더블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선체 바깥에서 배회하는 수많은 크리퍼들은 사실상 그 동안 수없이 죽어갔을 익스펜더블의 망령들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그렇게 매혹적인 부분부분들의 귀결이 '이제 행복해져도 괜찮아'라는 건 쉬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행복해지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다소 나이브한 결론이다. 또 영화가 반드시 답을 제시해야 할 필요도 없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메시지를 원한다면 전보를 쳐라'고 했단다. 마찬가지로 사회 문제에 대해 그렇게 답을 제시하고 싶다면 논문을 쓰시거나 정치를 하시라. 엄혹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답을 제시하지 않은 많은 명작들이 있다. 션 베이커의 <플로리다 프로젝트>,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문제점과 해결책이 연결되는 순간 그건 논리의 영역으로 전환된다. 즉, 아무리 영화라 하더라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그 둘이 정합성이 있는지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의도했는지는 불명이지만) 특정 정치인을 연상시키는 등장인물까지 있다면 아무리 배경을 우주로 확장한다고 해도 관객을 자꾸 실제 지구로 끌어당기는 셈이고, 관객은 그 토대 위에서 정합성을 판단할 것이다. 즉, 스스로 불리한 전장으로 걸어들어간 셈이다.
그러면 이 지구 위에서 다정한 것들이 수없이 패배하고, 외계 생물은커녕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나라 사람들끼리도 말이 도통 통하지 않고, 연대는커녕 만인이 만인에 대항해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아무튼 선한 자들이 승리하니 행복해지자고 말하면 그냥 고개를 끄덕거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세상이 그렇게 따뜻한 곳이라고 믿는 관객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앞서 <미키17>은 개인의 자아로 수렴하는 영화라고 했는데 영화 내적으로는 계속해서 구심력을 더해 가는 와중에 관객은 자꾸 영화 바깥으로 시선이 돌아가는 원심력을 동시에 받으니 찢어지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노릇이다.
본작은 미키의 자아 찾기가 주된 가지니까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미키17은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여야 하는지를 찾고 생의 의지를 이어나가기 위해 어떤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했는가? 전술한 붉은 버튼의 세 가지 변주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는 또 다른 자아인 미키18이 했고, 하나는 환상 속에서 있었던 일이고, 마지막 하나는 의회가 만든 이벤트에서 부여된 역할만을 수행했을 뿐이다. 미키17은 그 과정에서 철저히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마샬에게 대리로 화내 준 것은 미키18이고 마샬을 없애겠다고 총을 쏜 것도 미키18이고 멀티플 상황에서 관계를 앞장서 주도한 것은 나샤이다.
따라서 전술한 내용에는 약간의 수정이 덧붙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증명하도록 운명지어졌다'고. 결국 감독에 의해 정해진 귀결로 향하는 미키17이 새롭게 자아를 찾은들 어떤 감흥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조차 영웅들은 신탁에 졸졸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스르려 노력하는 데에서 영웅성과 비장미를 더했다.
봉준호가 그려 온 세계가 아름다웠던 것은 심지어 동화적인 색채가 가득했던 <옥자>에서도 위화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만 보여 주는 자그마한 희망 덕분이었다. 모 평론가님이 꽤 적절하게 표현하셔서 화제가 되었던 '횃불이 아니라 불씨'라는 표현처럼. 글쎄, 이번에는 세계가 아니라 개인에 집중을 해서인지, 추한 세상 속에 살아가는 개인은 그래도 아름답다는 마지막 휴머니즘을 발휘한 것일까. 하지만 과거의 한참 날 서 있고 삐딱한 봉준호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설국열차>에서는 기차를 뒤엎고, <기생충>에서는 도달하지 못할 모스 부호 편지를 보내고, <살인의 추억>에서 처연한 응시를 던지던 봉준호는 어디로 갔을까.
다소 억지로라도 대안적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제 행복해져도 된다고 했지만 미키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케네스 마샬을 만들어 냈던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에게 열광했던 대중들도 그대로이다. 나샤는 대중들을 설득하고 다루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히틀러와 케네스 마샬이 그랬듯이) 행성의 혹독한 환경은 강력한 지도자를 부르게 되어 있다. 케네스 마샬이 미디어를 이용해 성공했던 것처럼 따지고 보면 나샤가 의원이 된 것역시 마샬 부부의 악행이 몰래 촬영되고 (아마도) 미디어를 타고 번졌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크리퍼들의 고음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마마 크리퍼의 엄포는 허풍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미키17이 마지막에 케네스 마샬이 인쇄되어 나오는 환상은 본 것은 어쩌면 나샤의 연설을 들으면서 새로운 케네스 마샬의 탄생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미키는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다. 행성에는 새로운 어둠이 닥칠 것이고 마샬 부부로부터 이주민들과 익스펜더블을 구한 영웅이라는 휘광을 등에 업은 나샤는 마샬 부부보다 더 교묘한 조작으로 행성을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미키는 사랑하는 사람이 케네스 마샬의 포지션에 오르고 자신은 일파 마샬의 포지션을 받아들일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유난히 혓바닥이 길었다. 봉준호라는 이름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괜히 의미만 잔뜩 부여한 것인지, 반대로 그 이름에 건 기대감 때문에 너무 가혹한 판단을 내린 것인지 모를 일이다. 봉준호는 그만큼 한국 영화의 현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