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인 Seventh Seal은 성경 중 요한계시록에서 따 왔다고 한다. 성경에 지식이 전무하여 어떤 맥락인지 알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서양 문화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알기 위해서는 역시 종교와 무관하게 성경에 빠삭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 하나 더하자면 그리스 로마 신화까지?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해골의 이중적인 변용이다. 흑사병 순례단은 해골을 죽음의 이미지로 사용한다.(장면1) 그런데 유랑하는 광대 일행은 이를 자신들의 공연에 사용하면서 유희의 이미지로 변용한다.(장면2) 그런데 항상 죽음의 이미지는 유희의 이미지에 침입해 들어온다. 대표적으로 광대의 공연장에 십자가를 앞세운 흑사병 순례단 행렬이 침입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장면이 그렇다. 블로크가 광대 일행과 편안한 한때를 보내는 풀밭 뒤쪽으로 죽음이 나타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대적 배경이 흑사병이 창궐하는 시기인만큼, '말 그대로' 죽음만이 도처에 가득한 곳이다. 비유적으로도 '죽음'은 블로크가 지나가는 길 어디에나 등장할 수 있다. 특히 블로크에게 고해를 받던 성직자, 마녀 호송 일행과 함께하던 성직자의 정체는 알고 보니 '죽음'이었다. 심지어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죽음'의 첫 등장은 블로크가 잠에서 깨어나 기도를 마친 직후였다.(장면3) 마치 너는 신을 불렀지만 내가 왔다고 조소를 날리는 것처럼. 블로크가 신(과 그 대리인)을 찾아 헤맬 때마다 정작 나타난 것은 죽음이었다는 점은 의도된 아이러니이다. 동시에 신은 어디에도 없다는 블로크의 절망은 한층 심화된다.
여기에서 베리만이 신이나 운명에 대해 가지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굳이 다른 명감독들과 비교해 볼 때 타르코프스키는 누가 봐도 아주 애절하게 믿는 쪽이다. 반대로 벨라 타르는 철저하게 부정할 것이고 부뉴엘은 부정을 넘어 그냥 냉소와 조소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베리만은 그 존재를 끝없이 찾아 헤매지만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을 예지했거나 그것이 없을 것이라는 회의로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냉담자' 정도의 포지션이라고 하면 적절할 듯 싶다. 동시에 블로크 역시 끝없이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한다는 점에서 감독의 포지션이라 할 것이다.
물론 무신론자의 입장이라면 신을 '존재의 이유'로 확장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의 이유는 비단 신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악마가 될 수 있다. 후자의 예시가 마녀 사냥의 희생자이다. 그는 자신의 눈에 악마는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블로크의 말에 악마는 언제나 자신의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다고 반박한다. 억울하게 마녀로 몰린 입장이라면 오히려 악마와 자신의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일 텐데,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신에게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다른 인물들과 반동적 거울상인 것이다. 물론 두 가지 방향의 시도 모두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광대 가족들만 유일하게 죽음과 동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하게 생의 능동적인 감각을 향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가 죽음과의 체스를 두고 고뇌하는 샷 뒤로 광대 가족과 조우하는 샷이 붙는데 이름이 '미카엘'이라는 아이를 만난 순간이 기사가 그렇게 찾아헤매던 신성으로부터 가장 가까이 도달한 순간일 것이다.그 때는 죽음과 대적해 체스를 둘 필요가 없었다. 블로크가 죽음과 체스 대결을 제안한 것의 시작이 그렇게 시간을 벌어 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자 함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순간은 존재의 증명에 대한 압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던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광대 가족과의 짧은 휴식이 끝나고 다시 죽음과 대면했을 때 죽음이 있는 근경과 광대가 있는 원경의 차이는 이를 대변한다.(장면4)
광대 가족이 블로크 및 그 일행에게 들판에서 산딸기와 우유를 대접하는 장면은 흑백 화면을 뚫고 나올 정도로 강한 광량으로 이들의 밝은 이미지를 강조한다.(장면5) 동시에 작품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블로크가 고뇌에서 잠시 벗어나 즐거움을 맛보는 장면이기도 하다. 더불어 광대 부부의 아이는 이러한 감각을 재생산하여 생의 순환을 나타낸다. 이러한 순환의 이미지는 '죽음'이 베어 낸 나무 그루터기 위로 다람쥐가 올라타는 장면으로 변주되기도 한다.(장면6)
이러한 모습은 마치 니체가 말한 '아이의 정신'을 떠올리게도 한다. 니체는 정신 발전의 단계를 낙타의 단계, 사자의 단계, 아이의 단계로 나누는데 신에게 복종하고 관습과 당위의 세상에 살아가는 흑사병 순례단은 낙타의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블로크는 기존의 신 중심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사자의 단계와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광대 가족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순응하고 자신의 삶을 유희처럼 즐기는 데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아이의 단계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게도 광대 가족은 작중에서 유일하게 아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는 죽음의 춤(장면7)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과 동행하는 순간에 춤을 추고 류트를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게 이미 블로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성이 찾아오고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겠지. 대단한 삶의 의미 그런 거 몰라도 산딸기와 우유와 따스한 햇볕만으로도 충분히 살 만 하지 않느냐고. 어떤 사람들은 해골 앞에 무릎을 꿇지만 다른 사람들은 해골을 가지고 놀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