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다큐멘터리인데 픽션과의 경계를 확정하기 힘들다.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까지 이 영화 전체가 진짜 다큐멘터리인지 아니면 모큐멘터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실존 인물이 참여할 수 없는 일부 배역에는 재연 배우가 참여했다. 첫째, 둘째 딸(라흐마, 고프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네 딸의 엄마인 '올파'는 실존 인물이 있음에도 재연 배우가 함께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특정 사건을 재연하면서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부분을 커버하기 위함이라지만 글쎄 셋째, 넷째 딸(에야, 타이시르)은 굳이 커버해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올파에게 이와 같이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한 것은 올파가 영화의 중심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큐를 재현의 장르로 볼 때, 올파는 그 경계선에 위치한다. 즉, 실존 인물인 실재의 올파와 재연을 담당하는 재현의 올파가 있다. 이는 다시 구세대의 질서를 이미 내면화한 구세대의 올파와 새로운 세상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신세대의 올파로 이어진다. 세대의 관점에서는 모친으로부터 저주를 물려받은 동시에, 자신의 딸들에게 같은 저주를 물려주는 운명인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올파 내적으로는 시대의 변화에 끼인 이중적인 인식을 드러낸다. 자신은 히잡을 입기 싫지만 딸들은 입었으면 좋겠다는 식이다. 아랍의 봄으로 민주화로의 이행은 일단 완료했지만 이를 공고화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동안 권위주의 정부에 의해 억제되었던 이슬람 극단주의의 공격까지 받게 된 튀니지 신생 민주 정부의 현실을 보여 주는 듯하다.
올파와 네 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다. 올파는 구세대의 질서로 딸들을 통제하려 하면서 갈등을 유발하고 이들이 엇나가는 하나의 원인을 제공한다. 반대로 딸들은 구세대의 질서를 강요받는다는 점에서는 피해자이지만 그 반동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에 합류해 가해자 입장에 선다. 이런 가해자 구도가 더욱 비극적인 것은 가해의 방향이 위와 아래 두 방향을 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올파에게는 영화의 진행 시점에 이미 가해가 발생하였고, 둘째로 그들의 딸인 파티야에게는 감옥 안에서 자라 정상적인 사회인이 될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가해가 예정되어 있다. 이것이 올파가 말했던 '가해의 대물림'으로서의 '저주'이다.
<올파의 딸>은 단순한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부족하다. 예를 들어 올파와 네 딸들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재연 배우가 담당하여 이들의 직접 진술을 듣지 못한다. 따라서 올파가 이들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진술을 했다 하더라도 사실 이를 검증할 장치는 없다. 또한 올파와 딸들 사이에 있던 사건에 대한 진술도 인물에 따라 진술이 조금씩 다르다. 무의식적인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숨겼을 수도 있고 진짜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관객은 감독 및 배우들에 의해 그려진 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퍼즐을 맞추듯이 나름대로의 진실을 짜 맞추어 가야 한다. 실재의 올파와 재현의 올파가 특정 사건을 두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장면은 일종의 자아분열을 연상케 하면서도, 입장과 시점의 충돌을 통해 발견되는 진실의 단면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 감독은 이 참혹한 문제의 책임을 누구 하나에게 묻기 어려운 회색지대로 날려 버린다. 예를 들어 전술한 히잡에 대한 올파의 이중적 태도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렇다고 네 딸들에게 올파의 주장을 수용할 것을 강변할 사람은 또 몇이나 되는가. 즉, 특정 입장에 동의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이해 정도는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더 높은 성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결론에 대한 동의, 과정에 대한 이해, 심정적인 공감 세 가지를 잘 구분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영화의 덕목은 더욱 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올파와 딸들의 행동 자체에 대해 옹호할 수는 없고(결론에 대한 동의) 그들의 심정에 대해 감정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심정적인 공감)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결론으로 흐를 '수도' 있었겠구나 이해는 할 수 있는 것이다.(과정에 대한 이해)
그렇게 올파 가족의 아픔이 어느 방향으로도 해소되지 않은 미완의 상태이기에, 그 혼곤함은 극장을 나서는 관객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아니 누군가를 탓할 수는 있는 것인가.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갈 길을 잃은 원혼들은 영화 속에서 헤맬 뿐이다. 그래도 하나의 자그마한 희망을 걸자면 '에야'와 '타이시르'가 이 저주받은 피의 흐름을 끊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