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말(벨라 타르, 2011)

by NYX


소위 명작들을 실제로 보면 그 상찬에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매우 많다. 그리고 반대로 '어디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러나 보자' 하다가도 낭중지추라고 저절로 정좌하고 의관을 바로잡아야 할 것 같게 만드는 영화들도 있다. <토리노의 말>은 소위 말해 '진짜'다. 인트로에서 어느 날 니체(흔히 아는 그 프리드리히 니체 맞다)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꿈쩍 않고 있는 말을 보고 미쳐 버려서 10년 동안 전신마비 상태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말과 마부 등장하고 6일 동안 이들의 반복되고 단조로운 일상이 흑백 화면과 롱테이크 속에 끝없이 펼쳐진다.


보통 6일 간의 시간이 영화 속에서 흐른다면 대략 러닝타임의 6분의 1씩을 적당히 균분하여 하루씩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체의 3분의 2 가량은 앞의 이틀이다. 그리고 나머지를 4일이 나누어 갖는 비중인데 앞에서 쌓아올려 놓은, 아주 지루할 정도로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뒤에서 무언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2일째에는 말이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마치 토리노의 말처럼), 3일째에는 먹이를 거부하고, 4일째에는 우물물이 마르고, 5일째에는 온 세상의 불이 꺼진다. 그리고 6일째, 마침내 종말이 찾아온다. 따지고 보면 6일이라는 기간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 성경에서 천지창조는 6일 동안 이루어졌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7일째에 휴식을 취했다지만 <토리노의 말>에서는 6일째에 세상이 멸망했으므로 7일째는 오지 않는다. 창세기에서는 '빛이 있으라' 했지만 <토리노의 말>에서는 마지막 한 줄기의 빛마저도 사라져 버린다. 에덴 동산에는 사과나무가 자라지만 마부 부녀가 사는 집의 언덕 위에는 나뭇잎 하나 남지 않은 벌거벗은 황량한 나무만 한 그루 있다. 따라서 <토리노의 말>은 아주 노골적으로 창세기를 정반대로 뒤집은 벨라 타르식 <안티크라이스트>이다. 결국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인물(과 동물)이 움직임을 멈추고, 시종일관 사납게 불던 바람은 6일째에 완전히 소리를 감추고, 빛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삶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6일을 다룬 것이나 다름없다. 굳~이 이과식으로 따진다면 엔트로피가 작아져 가는 6일.


짧은 지식으로나마 엔트로피를 이해해 보자면 4일째에 부녀가 보인 행동이 설명된다. 우물물이 마르자 부녀는 수레에 짐을 싣고 집을 떠나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그런데 머지않아 같은 길을 따라 다시 돌아오고 짐을 다시 집에 푸는 과정 동안 이들이 돌아오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또한 3일째에 이들의 집을 방문한 집시 일행 역시 곧바로 튕겨져 나간다. 이들의 집이 사실상 닫힌 계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쪽 표현이 더 마음에 드는데) 일종의 연옥에 갇힌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꾸역꾸역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에 갇혀 벌을 받고 있는 연옥.


실제로 마부와 딸이 사는 집은 어찌 보면 감옥처럼 묘사되는데 마굿간의 닫힌 문은 가운데 문 사이의 좁은 틈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막힌 형태이다.(장면 1-1) 반면 마부나 딸이 밖을 바라보는 창문은 전체적으로 뚫려 있지만 가운데 창틀 프레임 부분만이 막힌, 프레임 속의 프레임 형태이다.(장면 1-2) 즉, 둘은 일종의 반전된 거울상이면서 마부 부녀가 사실상 말의 처지와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다. 오히려 더 나쁜 것이, 마부 부녀는 바깥을 바라볼 수는 있으면서도 여기를 벗어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장면 1-1, 1-2 :


대부분의 앵글은 카메라 움직임도 최소한으로 절제하여 아주 단조롭게 구성된다. 하지만 개중에 가장 역동적으로 담은 장면이 둘 있는데 첫째는 토리노의 말에 대한 내레이션 직후 집으로 돌아오는 말과 마부이고(장면 2-1, 2-2) 둘째는 우물물이 마른 뒤 집을 떠나려고 수레를 끄는 마부와 딸의 모습이다.(장면 3-1, 3-2) 그런데 이 둘은 상당히 유사하게 컷이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어느새 마부와 딸은 말의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말이 3일째에 먹이를 거부하고 나서 6일째에 딸도 식사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이 2일째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자 발이 묶인 마부와 딸도 결국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작용 역시 이를 예증한다.


<장면 2-1, 2-2 : 집으로 돌아오는 말과 마부>


<장면 3-1, 3-2 : 잡을 떠나는 마부와 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말이 마차를 끄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 함은 개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에 앞서 결정된 것으로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이를 신의 권능이라 볼 것이다. 실제로 영미권에서 '소명 의식'에 기반한 직업은 신의 부름이라 하여 calling으로 표현하기도 한단다. 더 나아가 말이 먹이를 거부하고 인간이 감자를 먹지 않는 것은 생존의 기본적인 요건인 식생활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역이다. 실제로 기독교 세계관에서 자살이 중죄 중의 중죄라는 점은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먹어야 '한다'는 마부의 의무론적 단말마는 닥쳐오는 어둠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전술했던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을 조금 어휘만 바꾸어 보자면 세상의 질서나 도덕이다. 결국 에덴 동산의 몰락은 기존 세계에서 통용되었던 가치관들의 몰락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란 감자를 먹고 물을 긷고 창 밖을 바라보고 불을 끄고 잠드는 존재 이외에 그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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