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리코르디아(알랭 기로디, 2025)

by NYX


영화는 어딘가로 가는 차 안에서의 POV로 시작한다. 쭉 뻗은 길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다 보면 마치 나선형 계단을 따라 어디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 여로의 마지막에 도달해 보면 자그마한 제과점 앞에 자동차가 멈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게임의 규칙이 바뀐다.


알랭 기로디가 그리는 세계는 이른바 삑사리가 나는 세계다. 동일한 표현이 봉준호에게도 쓰이는 걸 알고 있으면서 차용을 좀 했다. 봉준호의 작품에서 삑사리라는 표현이 쓰일 때는 보통 인물의 행동이 한순간 어긋날 때에 쓰인다. 예를 들어 <기생충>에서 지하실을 몰래 훔쳐보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던 기우네 가족이 서로에게 걸려 우당탕 무너지면서 들키는 장면이라던가. 하지만 알랭 기로디에게 있어서 삑사리는 상황적 어긋남이다. 인물들이 일반적인 상식과는 2% 어긋나게 돌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찰관은 제레미가 살인범인지를 밝히는 것보다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데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부는 고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고해를 하고, 묘한 논리를 들어 살인범을 옹호해 주며, 동성애 현장을 연출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야기가 전개됨에 있어 중요한 부분마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기도 한다. 제레미는 확신의 동성애자인 것 같기도 하지만 갈수록 이성애자인가, 그러면 바이인가? 싶기도 하며 왈테르는 반대로 이성애자 같았는데 가끔씩은 동성애자인가 싶다. 버섯에 이상하게 집착하고 열심히 버섯을 따러 다니는 사람은 다름아닌 신부이다. 그렇게 상황들이 안개처럼 흐릿하고 그 상황과 인물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알랭 기로디만의 독특한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제레미가 들어선 마을에서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지배하는 것은 욕망이다.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Non-normative love 기류에서 암시되듯이. 하지만 욕망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정화이다. 제목인 미세리코르디아가 '자비'라는 뜻이라는데 개인적으로는 '정화'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신부와 마르틴이 제레미를 받아들인(?) 것이 욕망과 포용 중 어디에 속하는지 확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 둘은 불가분의 것처럼 보인다. 마치 시체를 암매장한 곳에서 계속해서 자라나는 버섯처럼 욕망의 무덤 속에서 정화의 힘이 자라난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버섯은 그늘지고 음습한 곳에서 자라나면서 곰팡이 포자처럼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은밀하게 퍼져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욕망을 이미지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서로 융합하기 어려운 개념들이 키메라처럼 기묘하게 합쳐져 있는 이 마을에서 욕망과 정화의 융합은 그 정점을 찍는다.


전통적인 성과 속의 이분법에 기대어 그 둘을 무의식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관객에게는 지속적으로 혼란스러움을 안겨 줄 수밖에 없다. 클라이맥스 및 결말에 이르러서는 결국 그 동안 유지해 왔던 가치관이 전복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익함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미세리코르디아>는 그 뒤에 어떤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전복 그 자체에만 주목하고 있으므로, 다소 당혹스러운 결말 이후에 제레미가 필립이나 마르틴과 어떤 관계가 되었을지 역시 (궁금하긴 하지만) 보여 주지 않는 것도 납득이 된다.


이렇게 (긍정적인 의미에서) 반사회적인 가치관을, 이렇게 매혹적이면서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감독의 야심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아마도 이대로라면 올해의 영화 후보에 충분히 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들의 교복시절(장경신,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