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렌 와이즈먼, 2025)

by NYX


21세기 최강의 액션 명가 맛집 <존 윅> 시리즈의 스핀오프다. 사실 <존 윅> 시리즈가 호평을 받은 부분은 각본이 조금 구려도, 캐릭터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도, 아무튼 액션 영화에서 기대하는 액션을 고봉밥으로 체하기 일보 직전까지 말아 줬다는 거다. 더 나아가 무한탄창으로 대표되는 액션의 비현실성을 상당 부분 제거하고 (픽션치고) 상당히 현실적이고 처절한 그림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는 점인데, 이를 다시 말하면 영화의 컨셉을 확실히 정했다는 의미다.


<존 윅>과의 차별화를 위해 <발레리나>는 '여자처럼 싸워라'를 일종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내세운다. '이브'가 맞닥뜨릴 적은 항상 그보다 강할 것이고 '이브'는 불리한 전장에서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야비하고 치사하고 꾀를 부리고 상대를 속여야 이길 수 있다는 거다. 여기까지만 해도 제작진이 사고 한 번 제대로 칠 줄 알았다. 발레리나 여성 킬러가 여자처럼 싸우겠다니 뭔가 양산형 단순무식 주먹질 총질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컨셉이 나올 줄 알았지. 여성이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영춘권도 있고,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처럼 암기로 승부할 수도 있고, 발레리나니까 유연성과 아크로바틱을 재료삼아 액션을 짜 볼 수도 있었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을 텐데 그게 잘 안 됐다. 그러면 결국은 타격감 약한, 기존의 <존 윅> 하위호환이 되어 버리는걸.


아나 데 아르마스가 육탄전 액션을 엄청 잘 소화한 건 아니라 이런 단점이 더더욱 부각된다. 굳이 말하자면 육탄전에서는 그냥 평범한 양산형 영화였다가 '이브'가 뭘 손에 들고 나서 조금 나아졌다가 후술할 몇몇 잘 뽑힌 씬에서 소화불량 내려가는 식이다. <007:노 타임 투 다이>에서 '팔로마'로 나왔을 때는 엄청 인상깊었어서 내가 뭘 잘못 기억하고 있나 쿠팡플레이에서 다시 돌려보니까 그 때는 이렇게 육탄전 비중이 높지 않았었다. 대부분 총기를 들고 있었고 나머지 맨몸 액션도 '팔로마'가 일방적으로 엑스트라들을 때려눕히는 역할이었지 <발레리나>에서처럼 단독으로 개싸움을 하는 롤이 아니었다. 그 경우는 배우의 한계를 컨셉 또는 연출로 커버친 케이스라 하겠다.


물론 이게 잔뜩 부풀었던 기대만큼은 창의적으로 안 나왔다는 소리지 못 만들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몇몇 씬들은 영화의 아이덴티티로 손색 없을 정도로 잘 뽑혔다. 모든 이들이 기억할 법한 화염방사기 씬이 단연 압도적일 것이고 합을 영리하고 쫀쫀하기로는 수류탄과 스케이트 씬도 제법 인상 깊다. 특히 <발레리나>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은 오히려 화염방사기보다 수류탄 씬이라 하겠다. 존 윅이 화염방사기를 쏘는 장면은 상상이 되지만 철문으로 하나 가둬서 죽이고 철문 반대쪽으로 다시 폭발 가드하고 다시 반대쪽에 첫번째 폭발 때 뚫린 구멍으로 도망가는 아기자기한 무빙 치는 장면은 상상이 안 되거든. 그냥 평범한(?) 수류탄만 가지고 이렇게 짜내는 거 보려고 액션 영화 보러 가는 거지.


'이브'는 극중에서 나온 것처럼 성경의 이브가 모티브일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주워 먹은 죄로 낙원에서 추방당했고, 이 '주워 먹었다'는 건 개인의 선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극중에서 '이브'에게 있어서 낙원은? 다름아닌 투스카 로마다. 투스카 로마는 '이브'의 선택 없이 디렉터의 지배 아래 움직이는 사회다. '이브'는 거기서 떨어져 나오기를 선택했고 그에 대한 대가를 극중 내내 감내한다. 극의 마지막에 '이브'는 발레를 관람하다가 자신에게 현상금이 걸린 것을 확인하고 '아래쪽' 계단으로 사라진다. 마치 낙원에서 쫓겨나 '떨어지는' 또 다른 이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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