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결말 스포 유
수백 년 전 동화를 영상화할 때 제작자들은 한 가지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원전에 충실하게 작품을 만들면 그 때 당시의 가치관과 현대의 관객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고, 원전과 독립적으로 각색을 하면 원전에 있던 특정 요소를 기대하고 있던 또 다른 관객들의 기대를 배신하게 된다. 이 덫에 그 동안 디즈니가 몇 번이나 나자빠져 코가 깨졌는지를 생각해 보면 <어글리 시스터>의 대담한 시도가 다시 보인다. 사실 디즈니풍 동화에 대한 카운터 어택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외모에 대한 강박은 기생충에 은유되어 표현되는데 촌충 알을 삼킨 엘비라는 끝없는 배고픔에 시달리게 된다. 촌충이 음식을 받아먹기 때문에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처럼 외모에 대한 집착은 고치면 고칠수록 점점 더 커진다. 더 나아가 이는 주변에게 전염될 수도 있는데 무도회 장면에서 엘비라는 무대 뒤에서 촌충 알을 한가득 쏟아내는데, 무용 선생님(?)이 대체 촌충 알을 어디서 구했을지를 생각해 보면 왠지 엘비라 이전의 누군가가 토해낸 알을 가져온 게 아닐까 하는, 다소 과한 상상도 가능해진다. 흥미롭게도 극의 초반에 얼굴에서 짜내는 피지가 하얗고 긴 것이(...) 촌충과 유사한 시각적 이미지를 보이는데 이 외모 강박의 맹아는 사실 엘비라의 내면에 이미 있었던 것이고 무용 선생님은 단지 트리거 역할만 했던 것이었을까.
외모 압력에 대한 바디 호러는 작년에 <서브스턴스>가 갈 데까지 가긴 했다. 그런데 <어글리 시스터>와 차이점이라면, 전자는 그 책임을 매스 미디어 쪽으로 기울이는 반면 후자는 결혼으로 대표되는 번식 및 가정 형성 과정 자체로 돌리는 듯 하다. 마지막에 엘비라를 구원해 주는 알마는 아직 2차 성징이 오지 않아 왕자의 무도회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무도회 준비 기간이 상당 부분 경과하고 나서야 초경을 하게 된다. 한밤중에 초경 사실을 안 뒤에 방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기생충을 먹고 주체할 수 없는 식욕에 휘둘리는 언니 엘비라의 모습이었다. 성에 눈뜬 알마가 앞으로 세상에서 수없이 마주칠 모습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처럼. 따라서 이 미친 광증의 근본적인 원인은 성과 결혼이라는 점에서 <서브스턴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그렇다면 이 악순환을 정지시킬 유일한 방법은 결국 현대 결혼 제도의 중단이라고 보아야 할 텐데 이는 현실에서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인지 알마는 그 세계 속에서 엘비라를 구원해 주지는 못하고 다른 나라로 함께 도피하는 데에 그친다. 감독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마치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젠시가 무니를 데리고 디즈니랜드로 달려간 것처럼 이를 환상 시퀀스로 보아도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듯 하다. 어쩌면 이는 현대 사회에서 이 비극을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비관적 전망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다만 <서브스턴스>에 비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관객을 너무 편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카메라 렌즈를 자꾸 관객 쪽으로 돌리면서 이 외모 집착 지옥의 원인을 일정 부분이나마 관객에게 되돌려 준다. 따라서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은 '불편'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어글리 시스터>를 본 뒤 관객은 너무나 쉽게 그 책임을 사회 구조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속 편하게 전적으로 피해자의 위치를 강탈하여 가상의 상처를 핥아 대기 시작한다. 프란츠 카프카가 그랬나. 책은 우리 마음 속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만일 책이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우리를 깨우지 못한다면 그 책은 읽을 이유가 없다고. 책뿐만 아니고 영화, 특히 사회 구조를 건드리는 영화는 더더욱 그렇다. 오히려 마음 속 얼음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버려 그 안으로 도피하게 하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