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의 최근 영화들은 능글맞은 영감의 개똥철학(좋은 의미로) 놀음인 것 같지만 그의 초기작은 이렇게 실험적이고도 날카로웠다. 스토리는 빈약한데 그걸 과감한 연출빨로 채운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스토리가 빈약해도 영화에 매료될 정도로 연출이 아름다웠다는 의미다.
영화는 최면을 거는 음성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최면이란 피험자의 행동을 실험자가 사전에 지시, 결정하는 행동이다. 예를 들어서 숫자 셋을 세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다섯을 세면 무슨 말을 하고... 즉, 피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의 미래는 이미 최면술사에 의해 예지되고 지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최면의 대상은 누구인가? 일차적으로는 당연히 주인공인 레오폴드겠지만 동시에 극 밖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도 그 대상이 된다. 따라서 오프닝의 내레이션은 레오폴드와 함께 관객의 미래도 예정해 둔다.
오프닝의 최면 영상과 함께 나오는 것은 어두운 밤에 철도를 따라 달리는 기차의 모습인데 레오폴드는 기차의 침대칸 차장으로 취직해 기차 안에서 근무한다. 기차는 오프로드 라이딩이 안 되고 철로라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는데 이는 최면에 의해 예지된 레오폴드의 미래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기차는 마치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처럼 이들의 개체성을 압도하는 단일의 존재인 것처럼 등장한다.(장면 1) 따라서 레오폴드가 폭탄을 터트린 것은 단순히 테러 행위라기보다는 개인으로는 어떻게 벗어날 방법이 없는 운명(내지는 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을 감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차 안에서 레오폴드는 항상 무언가에 의해 짓눌린다. 기차 안은 양쪽에 객실이 있을 뿐 아니라 그나마의 좁은 복도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장면 2) 그래서 레오폴드는 한 번도 복도를 편안하게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반면 레오폴드가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었던 때는 오직 기차 밖으로 나왔을 때뿐이다.(장면 3) 레오폴드가 기차에서 한 번 내렸다가 다시 돌아간 순간부터 결말은 이미 암시된 것이나 다름없다. 기차 밖에서의 삶을 상상할 수 없고, 기차 안에서는 도저히 내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나를 보존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므로.
앞서 말한 최면을 통해 레오폴드와 관객 간 동일시가 이루어진다고 볼 여지도 있다. 기본적으로 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에 더해 최면 내레이션이 이를 명시적으로 지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상적인 영화 이론에서 이 과정은 무의식 중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유로파>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이 동일시를 의식 위의 과정으로 끌어올린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이 내레이션을 보니 내가 이 인물과 같은 입장이 되는 거구나'를 의식한 다음에 다소 인위적인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레이션이 나올 때마다 그에 의해 의도적으로 동일화되는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게 되므로. 따라서 이는 어찌 보면 제4의 벽 문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동일시가 아니라 소격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감독은 <도그빌>의 인위적 세트장으로 이루어 냈던 것처럼 <유로파>에서도 관객을 계속에서 극 바깥으로 밀어낸다.
관객이 극으로부터 소격되는 동시에 레오폴드는 극 내부로부터 소격된다. 극의 배경이 마치 스크린인 것처럼 처리되는데, 이는 레오폴드와 그를 둘러싼 세계가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괴리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 때 레오폴드는 진정으로 영화 내 세계에 존재한다기보다는 스크린으로 상징되는 또 다른 세계 앞에서 휘적휘적할 뿐인 공허한 인물이 되어 버린다. 주어진 예시는 레오폴드가 결혼하는 장면인데(장면 4), 그가 마주보고 있는 주례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스크린화되어 처리되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 세계 속에서 결혼하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위의 예시를 주의깊게 보면 일부는 흑백, 일부는 컬러인 것을 눈치챌 수 있는데 <유로파>는 실제로 대부분 흑백 영화이면서 부분부분 컬러 화면이 삽입되었다. 컬러 효과가 들어간 인물이나 사물은 당연히 관객의 주목을 끌고 향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지시킨다. 실제로 극중에서 특정 역할을 하기도 전에 그 역할로서의 운명을 지는, 또다른 기찻길 위에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가는 존재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컬러로 첫 등장을 한 카타리나는 당연하게도(?) 레오폴드에게 중요한 인물이 되며 붉게 표시된 비상정지 손잡이는 그것이 당겨지기도 전에 그것이 당겨질 것임이 예지된다.(장면 5)
외적으로는 감독이 극중의 인물과 사물들을 예정된 운명을 따라 마음대로 굴리는 한편 내적으로 레오폴드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시대와 사회에 의해 휘둘린다. <유로파>는 시대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 처절하게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대, 사회 같은 거대 담론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사랑, 가족 같은 미시적 영역에서 찾기도 하지만 <유로파>에서는 가족조차도 시대의 광풍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 혹자는 이와 같은 <유로파>의 극도로 비관적인 전망에서 벗어나기를 원할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최면술사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그 역시 예지되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