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 #2(클린트 이스트우드, 2024)

by N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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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쥬얼, 그랜 토리노, 판의 미로, 인셉션 결말 스포 유)


이스트우드의 인물상은 보통 '직업적 소시민'이다. 말인즉,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을 대단한 이유 없이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비행기 기장은 예측지 못한 항공 사고에서 승객들을 구하고(설리) 변호사는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을 구하고(리차드 주얼) 군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한다.(아메리칸 스나이퍼) 더 나아가 단순히 직업적 측면을 떠나서도 한 노인은 소녀를 보호하고 동네 건달들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징벌한다.(그랜 토리노) 하지만 그 해야 할 바가 각각의 사정에 의해 조금씩 어긋나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검사는 승진에 잠깐 눈이 멀고 배심원은 진실의 발견보다 자신의 귀찮음이 먼저고 전직 형사는 정의감에 절차를 무시하고 우리의 배심원 #2(이하 저스틴)는 자신이 진범일지도 모르는 살인 사건의 배심원으로 선정된다.


모두가 아다시피 정의의 상징은 눈을 가리고 천칭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이고 이 이미지는 여러 가지로 변주된다. 영화의 시작에서는 저스틴의 아내가 눈을 가린 채 등장하고 마지막 즈음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천칭을 든 정의의 여신이 검사를 내려다본다. 흔들리는 저울은 곧 흔들리는 정의(진실)인데 전작인 <리차드 쥬얼>과 달리 <배심원 #2>는 바로 이에 대한 영화이다. <리차드 쥬얼>에서 무죄인 사람이 누명을 벗는 것과는 달리 <배심원 #2>에서의 정의는 훨씬 모호하고 현실반영적이고, 그만큼 인간적이다. 이 부분이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자기 고백인 것처럼 보인다. 하루하루 복잡해져 가는 이 세상에서 정의가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더 이상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랜 토리노>에서 감독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 가는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자기고백을 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뭐가 뭔지 모르겠을 정의 '따위'보다 자신의 안위가 조금은 더 중요한 세상에서 정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영화는 '찾을 수 없다'고 답한다. 따라서 마지막까지 문제 사건의 범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제임스는 진범일까 아닐까, 만일 아니라면 저스틴은 진범일까 아닐까. 더 나아가 진실을 찾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도 같다. <배심원 #2>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는 것보다, 그것이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상태에 대응하는 개인의 모습을 중요하게 본다. 만일 사건의 범인이 제시되었다면 저스틴의 죄책감, 자기합리화, 일말의 기대감, 불안감 같은 미묘한 감정들은 그 순간 진범에 대한 분개심(제임스가 범인인 경우), 공포감(저스틴이 범인인 경우)으로 납작하게 찌그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러닝타임 내내 차곡차곡 쌓아 온 감정의 산들은 마지막 순간 저스틴과 검사가 문간에서 마주한 순간 암전과 함께 폭발하고 마는데 이를 단순히 열린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보통 열린 결말이라 하면 결말이 지어지기는 하되 그 방향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아는 죽은 것으로 끝난다. 단지 사후 세계에서 평안을 맞이했는가 아닌가의 문제인 것이다. <인셉션>에서 코브는 미션을 성공했다. 단지 무사히 집에 돌아가 자녀와 해후를 했는지가 문제다. 하지만 <배심원 #2>는 조금 다르다. 결말의 조금 전, 그러니까 제임스에게 최종 형이 내려지는 순간 이야기는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의문을 품은 검사가 저스틴의 집으로 돌아가 둘이 마주하는 순간 한번 매듭지어졌던 것이 다시 터져 버린다.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새로운 이야기가 다시 시작하는 순간 끝나 버린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을 뿐이고, 결말의 순간으로 인해 이것이 미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끝나지 않았는가? 앞에서 이 복잡한 세상 속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고, 심지어 그것을 발견하는 게 중요한 것인지조차 불확실해진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에 대한 단서를 말미에 숨겨 두었다. 바로 각자의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찝찝함'에서. 저스틴은 제임스에 대한 형이 확정된 뒤에도 경찰차가 집 앞을 지나가면 불안에 떨고 검사는 꿈에 그리던 검사장으로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뻐하지는 못하고 정의의 여신상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왜? 이 결론이 정말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그 일말의 '찝찝한' 기운 때문에. 문가에서 마주친 둘은 서로가 같은 심경임을 무언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이스트우드가 발견한 정의란 그렇게 미묘하고 은유적이고 내심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정의를 드높여 외칠 때 조용히 그 뒷자리의 애매함에서 진실의 씨앗을 심는, 느낌표보다는 물음표에 가까운, 아직 이 세상이 뭔지 정의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할 줄 아는 이 노장의 영화를 칭송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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