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 때부터 유난히 흥행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이다. 물론 신인 시절에 '그 두 작품'의 처참한 실패가 나름의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하고 아무튼 대중 영화 감독이 흥행에 대해 관심 쓰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남의 돈으로 예술 하는 거니까.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오히려 더 위험한 신호일 수 있다. 차라리 관객 반응 신경 안 쓰고 내 마음대로 만들었다고 하면 (내가 투자자는 아니니까) 그런 대담한 시도에 박수쳐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중적으로 만든다고 했는데 두 번 연속으로 핀트가 안 맞았다는 건 박찬욱 감독이 근본적으로 대중성에 대해 영점을 못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호다.
영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빛에서 시작해서 어둠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만수는 태양 제지를 다니다가 실직하고 문 제지로의 재취업을 꿈꾼다. 또한 오프닝에서 만수는 햇볕이 내리쬐는 자신의 집 앞마당에서 파티를 즐기고 엔딩에서는 AI의 전면적인 도입으로 인해 더 이상 조명이 필요 없게 된 어두운 공장 안에서 혼자 근무한다.
표면적으로는 우선 단란해 보이던 중산층 가족의 붕괴로 읽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본다면 지나치게 얄팍한 해석이 되고 '어쩔 수가 없는' 비극에 휘말린 한 개인의 싸이코드라마라고 생각해 본다면 컨텍스트가 보다 더 풍부해진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고개 숙인' 남성의 이야기로 본다. 만수의 가짜 회사 이름은 레드페퍼이고 그 영감은 말 그대로 고추나무 묘목에서 나왔다. 만수는 미리가 다니는 치과 의사를 계속해서 의식하고 급기야는 외도를 의심하기까지 한다. 단순한 오해라기보다는 그 이전, 아마도 실직했을 대부터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격지심이 있었을 것이다. 집을 부동산에 내놓을 때 친구 관계인 동호네 가족이 방문하는데 동호 아빠에게 부부의 내밀한 공간인 안방을 침투당한 것부터 전통적 의미에서 가장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한다는 신호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 가족은 때로는 외부의 성적인 공격에, 때로는 경제적 압박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이 고개 숙인 남성은 각각 범모, 시조, 선출을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미 AI로 대부분의 인력이 대체되었고 아마 만수 역시 조만간 재실직할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만수의 지난한 재취업기는 피할 수 없는 미래를 앞에둔 자의 무용하면서도 처연한 '어쩔 수가 없는' 발버둥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경제적 어려움 및 재취업에만 한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이가 들면서 과거와는 달라져 가는 감독 자신의 모습이나 AI로 뚝딱하면 영상 한 편을 쏟아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직업인 영화감독으로서의 비애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어쩔수가없다>가 빛에서 시작해서 어둠으로 끝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매일 낮과 밤이 순환하는 것처럼 이 빛과 어둠은 사실 순환 관계이다. 이 구조는 일을 하다가 실업을 하고 다시 재취업에 성공하지만 사실상 재실업이 예정되어 있는 만수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극중에서 만수는 미리에게 안긴 뒤 60까지 내리지 말고(60, 59, 58...) 1부터 올려서 세 달라고(1, 2, 3...) 한다. 아래로 떨어지는 힘에 저항해서 위로 올라가 보려는 만수의 노력이지만, 우리는 시계에서 60초가 되면 다시 0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미리가 60까지 센 뒤에 다소 매몰차게 만수를 떼어놓고 일어서는 순간 60까지 겨우 채웠다고 생각했던 만수의 노력이 0으로 회귀해 버린다. 재취업을 위한 노력뿐 아니라 단란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까지 모두.
박찬욱 감독의 작품 세계를 세대별로 구분짓는다면 <아가씨>를 종점으로 1세대가 마무리되고 <헤어질 결심>을 기점으로 2세대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헤어질 결심>을 분기점으로 표현 수위가 대폭 완화되고 장르적 서스펜스나 카타르시스는 약해졌다. 이 때문에 혹자는 전자를 테토찬욱, 후자를 에겐찬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2세대 영화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데 약간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 하다. 과연 차기작에서는 영점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지 살짝은 불안한 심경으로 또다시 수 년을 기다려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