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고였을 뿐(자파르 파나히, 2025)

by N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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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지연된 수상은 올바른 수상이 아니다. 자파르 파나히가 속칭 황금종려상급 감독이라는 데에는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그 많은 필모그래피 중에서 <그저 사고였을 뿐>으로 수상했다는 데에는 의문이 있다. 물론 못 만든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3개의 얼굴들>도 상당히 좋았고 무엇보다 <택시>와 <노 베어스>에서 천장을 아득하게 뚫어 버렸는지라 본작이 상대적으로 쳐져 보일 뿐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작품은 일단 이란의 과거와,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현재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번에는 폭력의 되갚음에 대한 것인데 최소한 내가 감상한 작품들 중에서는 이 테마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처음이다. 더 나아가 전개 도중에는 과거의 피해자가 현재의 가해자로 오버랩되는 '듯한' 부분도 중간중간 나타나는데 이러한 변화가 향후 필모그래피에서도 지배적으로 나타날지 앞으로 주목할 일이다.


각설하고, <그저 사고였을 뿐>에서 개가 총 3번 등장한다. 오프닝에서 전직 고문관의 가족이 몰고 가던 차에 치인 개, 바히드가 고문관을 미행하다가 마주치는 개, 바히드가 고문관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결정하기 전에 계속 짖는 개. 첫번째 개를 친 뒤에 고문관의 부인은 딸에게 '아빠가 의도적으로 친 것은 아니고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개는 사실 과거의 무고한 희생자이다. 따라서 고문관이 개를 친 뒤에 무덤덤하게 피를 닦고 다시 가던 길을 간 것 역시 당연한 귀결이다. 반대로 바히드가 두번째 개를 만난 뒤에는 개를 치지 않고 피해 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개인데 바히드와 시바가 고문관의 운명을 결정하기 전에 계속해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데, 전술한 것처럼 개와 과거 희생자들의 동치 논리를 수용한다면 이는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의 원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원혼들은 바히드와 시바에게 뭐라고 속삭인 것일까. 자신들의 억울한 죽음을 갚아 달라고? 아니면 반대로 그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말라고? 이후 바히드의 행동을 보면 감독의 의도는 아무래도 후자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고문관의 사과가 진심이 아닌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바히드는 그를 단죄하지 않는다. 그리고 엔딩에서 새소리와 오버랩되어 들려 오는 의족 소리. 바히드는 아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소리를 의족 소리로 착각한 것일까, 아니면 의족 소리에서 벗어나 새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어쩌면 바히드는 미래의 소리를 당겨 들은 것인지도 모른다. 고문관은 바히드를 만나기 전까지 가족을 이루고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바히드는 약혼녀와 건강 모두를 잃었다. 이는 사건 이후의 사회가 이를 용인했다는 것인데, 설령 바히드가 고문관을 처단했다 하더라도 잠재적으로 또 다른 고문관이 탄생할 토양은 여전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히드의 행동에 대해 (다소 설득력은 떨어지지만 흥미로운) 제3의 설명도 가능해진다. 단죄를 하고 안 하고를 넘어서 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서 한 사람을 죽여 봤자 또 다른 고문관이 탄생할 것이고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것이므로. 이를 따른다면 엔딩 역시 또 다른 고문관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섬뜩한 의미로 재탄생한다.


예전에 어떤 평론가께서 한국은 뜨거운 영화는 잘 만들지만 차가운 영화는 못 만든다고 한 적이 있다. <노 베어스>는 그런 이분법 '따위'로 감히 분류할 수 없는 오묘한 온도를 잡는 데 성공했었던 반면 이번 영화는 지나치게 뜨겁다. 마치 그 사이에 감독에게 무슨 신상의 변화가 생기기라도 한 것처럼. 복수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선택은 다른 영화에서도 정말 사골이 나올 정도로 이미 우려먹은 주제이고 그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이 세련되게 제시되지도 않는다. 여러 모로 거장이 낳은 범작이라는 생각이 변하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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