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대륙(미카엘 하네케, 1989)

by N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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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은 시작부터 거장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이후 더 유명한 작품을 만들면서 일약 거장이 되었지만 어떤 측면으로는 오히려 이 데뷔작이 가장 걸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후속작에서도 집요하게 반복되는 인간 소외라는 테마는 여기서도 그 반짝거리는 맹아가 드러나며 비타협적 연출을 통해 이루어 낸 형식적 조응이라는 성과는 이 가족의 극단적인 선택에 관객이 일견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얼굴은 개인의 정체성 그 자체인데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는, 매우 일상적인 장면에서부터 인물들의 얼굴이 철저하게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장면 1) 따라서 관객은 인물들에게 이입한다거나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비밀스러움에 의한 거리감까지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엄마(안느)가 아이(에바)를 깨울 때 철저하게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안느가 에바를 애정 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지, 흘겨보고 있는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즉, 집 안 시퀀스에서는 마치 정물화처럼 인물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이 주인공이다.(장면 2-1~2-4)


스크린샷 2025-10-13 오후 7.34.04.png <장면 1 : 인물들이 배제되어 있는 식탁>


스크린샷 2025-10-13 오후 7.46.46-tile.jpg <장면 2-1 ~2-4 : 물건이 주인공인 프레임들>


그렇다면 집이 아니라 직장 공간에서는 어떠한가? 게오르그는 복잡한 숫자를 서로 맞추어 보고 안느는 기계로 안경알을 가공한다. 이와 같은 기계적,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인물들은 좀처럼 주체성을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의 대상화를 넘어 대상들이 인간의 자리를 침범해 가는 모습이다. 심지어 각각 87, 88, 89년도가 배경인 1, 2, 3부에서 거의 같은 일상들이 반복된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이질적인 컷은 마치 에바의 꿈 속인 것처럼 묘사되어 역설적으로 현실에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인 것처럼 보인다.(장면 3) 바로 여기가 일곱 번째 대륙인 셈이다.


스크린샷 2025-10-13 오후 7.57.16.png <장면 3 : 일곱 번째 대륙>


지리한 일상을 잠깐이나마 환기시키는 것은 안느와 게오르그가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터트리는 울음이다. 전후 사정을 아무리 보아도 그럴 만 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음에도 역설적으로 이 씬들에서 안느와 게오르그가 가장 인간적이게 된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긴장감을 3부에서 매우 극단적인 형태로 해체해 버리게 되는데 이 시퀀스는 일말의 해방감마저 느끼게 된다. 관객도 1, 2부의 지리멸렬한 일상 과정을 안느, 게오르그, 에바와 함께 겪었으므로.


<일곱번째 대륙>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뇌리에 남았을 법한 그 '물건 파괴 시퀀스'는 한순간 장 아메리가 말한 자유 죽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는 자살(자유 죽음) 역시 하나의 선택으로 존중받아야 하고, 더 나아가 인생에서 가장 주체적인 순간이 죽음을 스스로의 손으로 결정하는 순간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가 자살을 일종의 해방구로 본 것과는 달리 우리의 미카엘 하네케는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앞선 일상 모습 시퀀스만큼이나 관조적이고 건조하게 담기는 자살 시퀀스는 그보다 더 지리멸렬하다. 결국 안느 가족은 일상의 구축뿐 아니라 일상의 해체 과정에서도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물건들을 파괴하는 과정에서도 관객은 부수는 도구와 부숴지는 물건만을 볼 수 있을 뿐 그 도구를 휘두르는 사람은 볼 수 없다.(장면 4)


스크린샷 2025-10-13 오후 9.26.25.png <장면 4 : 파괴 시퀀스>


이 문제의 파괴 시퀀스는 그 동안 이 가족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공들여 해체하는 작업이다. 이들이 겪어 왔던 그 지리한 일상이라는 것은 사실 이것들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니 역으로 일곱번째 대륙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시 해체해야 하겠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전술한 것처럼 일곱번째 대륙은 도달할 수가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곳이고 이 가족은 자신들마저 해체할 수밖에 없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부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TV이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후속작에서도 이어지는 미디어 비판의 씨앗이 여기서부터 잉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내와 딸의 시체를 옆에 두고 자신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가운데 나오지 않는 TV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게오르그의 마지막 모습(장면 5)은 이전까지 이어진 일련의 시퀀스를 통해 지독히 비참하면서도 미적으로는 아름다운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스크린샷 2025-10-13 오후 7.38.05.png <장면 5 : 가족의 마지막 모습>


사실 에바는 이 파국이 시작되기도 전, 극의 극초반에 이미 이를 암시한 바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이는 무언가를 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마침 <일곱번째 대륙>에서는 컷과 컷 사이에 암전이 빈번하게 삽입되는데, 이 암전은 시각적으로는 실명 상태를 형식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더 나아가 눈의 실명과 화면의 암전은 둘 다 생의 죽음과 대유될 것이다. 따라서 관객은 화면의 암전을 바라봄으로 인해 단절감과 함께 이 가족의 예정된 죽음을 시각적으로 미리 체험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에바는 이 가족의 잠재된 위협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눈을 감음을 선택해 파국을 예지한 카나리아가 되었다.


하지만 이 기묘한 파국을 단지 파국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묘한 해방감이 깃드는 것을 보면, 우리 모두는 무의식적으로 이 가족과 같은 무기력을 공유하면서 각자 자기만의 일곱 번째 대륙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밀 시오랑의 <태어났음의 불편함>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자살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너무 늦게 자살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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