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리뷰는 거의 다 긍정적 뷰를 기반으로 했다. 하루에 몇 명 들어오지도 않는 변방 브런치이지만 작문 윤리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부정적 에너지는 전염되는 법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인터넷 영화 리뷰 문화는 지나치게 공격적이다. 굳이 여기에 숟가락을 더 얹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이 긍정적으로 봤는데 내가 소수 입장에 서게 되었다면 이를 애써 내보이는 것은 다양성의 측면에서 또 다른 작문 윤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뭐 그런 느낌.
반드시 영화 밖 감독(요아킴 트리에)과 영화 안 감독(구스타브)의 예술적 가치관이 동일하리라는 법은 없지만 반대로 둘을 완전히 별개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스타브가 보이는 가치관과 그가 만드는 영화는 그대로 이 <센티멘탈 밸류>의 일부를 이루게 되므로.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영화관은 상당히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많다. 만일 영화 속 영화가 작중 구스타브의 치유를 위한 싸이코드라마 기법이었다거나 <센티멘탈 밸류>가 영화가 아니라 요아킴 트리에의 싸이코드라마였다면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전적으로 환자의 치유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작은 문제가 있다면 이건 싸이코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라는 점이다.
구스타브의 영화를 통해 두 딸(노라, 아그네스)은 구스타브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고 부녀가 가까워지게 된다. 그런데 첫 기획 단계부터 이 영화는 구스타브의 컨트롤 하에 있었다. 애초에 구스타브의 의도대로 두 딸이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고 자신을 용서하고 가까워지기 위한 도구로 선택된 것이고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그 '예정된' 구원을 향해 맹렬히 질주한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영화는 물론이고 작중 레이첼, 노라, 아그네스는 그저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레이첼은 아무리 봐도 자기가 원하는 걸 똑바로 말을 못 하는 모자란 감독 구스타브 때문에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만 피해자인데 오히려 구스타브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앉아 있고, 아그네스는 자신의 아들을 영화에 출연시키려는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난 직후에 각본에 흠뻑 빠져 일독하고 나서는 180도 태세 전환을 해 버린다.
특히 <센티멘탈 밸류>는 영화가 치유의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관이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본작은 마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치유하는 등 영화가 할 수 있는 어떤 기능이 있고, (조금 과장하자면)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내지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끄러운 개는 물지 않는다고, 그것을 힘있게 역설할수록 반대로 그 주장은 점점 억지스러워진다.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까지 영화의 역할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어떤 영화를 관람하고 가족 간의 사이가 좋아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게 부당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side effect여야지, 그것이 본질적 역할이라고 믿는다면 차라리 영화 감독이 아니라 심리 상담사가 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전에도 '너무 쉬운 희망' 결론이 왜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지에 대해 두어 번인가 서술한 바 있다. 그러나 <센티멘탈 밸류>는 그것보다 조금 더하다. 너무 쉬운 데다가 너무 확신에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그 확신의 대상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 그 자체라는 점에서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