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테시가하라 히로시, 1964)

by N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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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문학의 위대한 거장, 아베 코보의 동명 소설 <모래의 여자>를 영화화했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이 모래로 사방이 뒤덮인 한 집에서 진행된다. 영상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것은 관객이 실제로 그 집에 살고 있는 것처럼 모래의 버석거림, 작열하는 태양의 뜨거움, 단비 같은 물 한 방울을 느낄 수 있게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이 빈번하게 삽입되어 피부에 묻은 모래 한 알, 땀 한 방울을 비추는 한편, 익스트림 롱샷으로 거대한 모래 사구의 움직임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다른 무엇보다 앞서 '감각하는 영화'라 하겠다.


이런 시각적 심상은 모래와 물의 '역설적' 유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당연히 모래는 건조하고 뜨거운 반면 물은 습하고(?) 차갑다는 감각적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익스트림 롱 샷에서는 얼핏 보면 모래사막에서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는 장면인지 물결이 치는 장면인지 단번에 알아보기 어렵다.(장면 1) 또한 문제의 사구 속 집에서는 물 대신 모래로 그릇을 씻기도 하고, 위에서 쉴새없이 떨어지는 모래를 막기 위해 비를 막을 때에나 쓸 법한 우산을 받쳐 놓기도 한다. 극 초반에 주인공이 물이 아니라 모래 위에 놓인 배에 앉아 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장면 2) 즉, 이 사구 마을이라는 공간에서는 모래와 물이 사실상 대립 개념이 아니라 하겠다. 둘이 유사 개념이라기보다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던 경계가 희미해지는 가상의 공간이라고 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Woman-in-the-Dunes-040.jpg 장면 1
Woman-in-the-Dunes-015.jpg 장면 2

극 후반부에 주인공은 그렇게 탈출하고 싶어했던 사구 마을을 떠나 바다를 보러 떠난다.(장면 3) 그런데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다시 사구 마을로 돌아와 버린다. 얼핏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지만, 모래와 물에 대한 전제를 떠올려 본다면, 주인공 역시 사구 마을과 그 밖이 사실상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모래와 물이 동의라면, 그 집합체인 사구와 바다 역시 동의이다.


결국 주인공이 사구 속에 안주해 버린다는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 사구를 떠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왜? 그 바깥 세상 역시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으니까. 이는 모래에서 모세관 현상을 이용해 물을 뽑아내는 것으로 다시 한 번 확인된다.(장면 4) 사구 구덩이 안에서 내내 남이 갖다 주는 물을 얻기 위해 그렇게 고군분투했지만 사실 물은 천지에 널려 있었던 모래 속에 숨어 있었던 셈이다.


Woman-in-the-Dunes-142.jpg 장면 3
Woman-in-the-Dunes-143.jpg 장면 4

물론 주인공은 처음부터 사구 집에 본인의 의사로 온 것이 아니라 정체 모를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납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유가 박탈된 사구 마을과 그 밖이 같을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노동자라면 다 알듯이) 언제부터 바깥 사회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갈 수 있었던가? 그리고 태어날 때 본인의 동의를 받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사구 마을에 던져진 것처럼, 우리 모두는 이 사회에 내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 없이 말 그대로 '던져졌다'. 사구 마을에서 끊임없이 모래를 퍼내야 했던 것처럼 바깥 사회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서 때로는(사실 매우 자주) 원치 않는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쯤에서 사르트르의 그 유명한 말을 언급해야만 하겠다.


모든 존재는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연약한 삶을 이어가다가, 우연하게 죽는다.


실제로 주인공은 학교 교사로 일을 하다가 곤충 도감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는 일종의 명예욕에 의해 사구로 곤충 채집을 나왔으며, 짧은 휴가 뒤에는 다시 학교로 복귀해야 한다. 따라서 바깥 세상에서도 학교에서 반복되는 노동을 해야 했고 그 과정이 정신적으로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이거 완전 사구 마을 아닌가? 주인공이 찾으려 마음먹었던 벌레의 이름에 '길잡이'가 들어간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전술한 것처럼 사구 마을에서는 모래에서 물을 뽑아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탈출을 포기하면서 자신이 뽑아낸 물에 대해서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바깥 세상에는 그런 것을 자랑으로 받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므로. 아니, 고작 그것이 무엇이기에 탈출을 포기할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에 대해 이미 탁월한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인생에 의미가 없으면 없을수록 더 훌륭히 살아갈 수 있다. (중략)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살아 낸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모세관 현상으로 물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아마 두 남녀는 여전히 모래를 퍼내는 노동을 해야 했을 것이다. 현실적 측면에서는 얻을 수 있는 물의 양이 자급하기에는 지극히 적기 때문이고, 영화적 측면에서는 인생의 부조리는 살아 있는 한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바깥 세상에 차고넘치는 물 따위를 모래에서 겨우겨우 뽑아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깥에서도 모래구덩이 속 운명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온전히 수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온몸을 던지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찾고자 했던 '길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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