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화(오즈 야스지로, 1958)

by N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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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는 언제 봐도 보법이 다른 정갈함이다. 마치 패스트푸드 잔뜩 먹고 질렸을 때 간만에 절밥을 먹고 난 뒤의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다다미샷'으로 이미 너무나 유명한 촬영 방식에 더해 '일본적인' 정갈함, 그리고 동양 특유의 세계관을 고려해 볼 때 흔히 말하는 일본 영화감독 3대장 중 서구권의 주목이 가장 늦었던 점은 다소 의아하기도 하다.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관은 일종의 비정한 순환론으로 보인다. 다른 영화 제목에 계절이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만춘>, <이른 봄>, <이른 여름> 등등), 필모그래피의 대부분이 가족 드라마이면서 결혼이나 죽음이라는 이벤트가 등장하는 것도 그렇다. 계절이 봄부터 겨울까지 지나가면 다시 봄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항력적인 순환 구조인 것처럼 인생도 그렇게 보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 죽는 불가항력성이 있지만 바로 '결혼'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사계절과 같은 순환 구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외관상 해피 엔딩인 경우에도 미묘하게 애상적 정서가 나타난다. 그리고 엔딩은 그 사이클의 끝단에 있는 인물이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피안화>의 와타루가 있고 <동경 이야기>는 아내를 떠나보낸 노년의 남편 슈키치가 있고 <만춘>은 딸을 시집 보내고 돌아온 아버지 슈키치가 있다. 결국 오즈는 '남겨진 자들의 비애'에 일관적으로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남겨진 자'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순환론적 인생관에 의해 한때는 신세대였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고 구세대가 되고 자신의 부모 세대가 했던 언행을 그대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승리자와 패배자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피안화>의 경우 일단 아버지(구세대)인 와타루와 딸(신세대)인 세츠코 간의 갈등은 대체적으로 봉합되기는 했지만 세츠코를 보러 기차에 올라탄 와타루의 표정은 마냥 편치 않다. 결국 외견상으로만 보면 와타루가 세츠코에게 일단 먼저 다가간다는 점에서 구세대가 신세대에게 고개 숙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기껏해야 일시적인 승리일 뿐이다. 전술한 것처럼 세츠코도 언젠가는 나이를 먹어 다시 구세대의 자리로 밀려나고 자신의 자식에게 와타루가 했던 실수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피안화>의 처음과 끝을 모두 '기차'가 장식한다는 점은 인상깊다. 기차는 정해진 길을 정해진 시간에 맞게 움직이는 교통 수단이다. 이 모습 자체가 오즈 야스지로가 바라보는 '인생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기차에서 뒤따라가는 칸은 어쩔 수 없이 앞선 칸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에서도 더더욱.


공간의 측면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다른 작품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지만) 일본 전통 가옥의 내부를 마치 미로처럼 표현해 종적인 깊이감을 잡음과 동시에 횡적으로는 좌우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설정했다. 화면비 자체는 가로가 짧지만 좌우 외화면에서 인물들이 나가고 들어옴으로써 사실상 화면이 좌우로 확장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부가 여러 미닫이문과 복도로 분할됨에 따라 마치 미로 같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그 자체로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안화>에서 구세대를 상징하는 와타루의 일본 전통 가옥은 상술한 것처럼 종적으로 깊고 횡적으로 외화면이 열려 있는 반면 신세대를 상징하는 타니구치의 신식 양옥은 깊이감이 얕고 횡적으로 닫혀 있는 모습이 대비된다. 이러한 프로덕션 디자인의 차이는 마치 직설적인 신세대와 (세츠코의 말을 따를 때) 빙빙 돌려 말하는 구세대의 생활 양식 차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피안화>가 더 좋았던 것 중 하나는 류 치슈, 하라 세츠코가 주연이 아니라는 거. 이 배우들한테 악감정은 없지만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단골로 등장해서 정면샷 받으면서 짓는 그 특유의 빵끗 웃는 표정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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