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코뿔소 Apr 05. 2019

세탁기

1.

《양들의 침묵》이라는 오래된 영화가 있어. 주인공은, 미주리였는지 아이오와였는지 하여튼 미국 어딘가의 시골 출신인 촌년 FBI 요원, 이름은 클라리스 스털링. 네가 언젠가 볼 수도 있으니까, 긴 말은 하지 않겠지만, 불안할 때면 세탁기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어. 


그 일정한 진동이 어딘가 안정감을 준다던가. 


세탁기, 하면 그 장면밖에는 떠오르지 않아. 여성들의 가사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 사회 참여의 발판이 되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보다 좁은 창문으로 달빛이 새어들고, 한 구석에 아직 빨지 못한 옷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틈에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세탁기를 꼭 끌어안고 불안한 숨을 내쉬는, 마침내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잠드는 클라리스 스털링.


클라리스, 빨래는 비명을 멈추었는가?


2. 

기르던 고양이가 세탁기에 숨어들었고, 그 사실도 모른 채 네가 빨래를 돌렸다는 말을 들었어, 왜 그랬을까, 고양이는 굳이 빨지 않아도 깨끗한 동물인데, 하는 생각이 우선 들어서 역겨워지더라, 당신이 아닌 내가. 고양이는 잠들어 있었을까? 아니면 돌아가는 통 속에서 털을 곧추세우고 애처롭지만 사나운 비명을 내질렀을까,

버튼을 누른 것은 당신이었겠지만 고양이를 집어넣고 문을 닫은 것도 당신이었을까.


놀랍게도 고양이는 살아 있었다고 당신 오빠가 이야기해 주더라. 지옥에서 방금 기어나온 듯한 - 차갑고 축축한 물의 지옥 - 몰골로 당신을 노려보았다던가.


클라리스, 고양이는 비명을 멈추었는가?


3.

세상을 빨 수 있는 것과 빨 수 없는 것들로 나누면, 기준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을, 미련을, 병을 빨아내어 희고 눈부시게 만든다면 분명 편하고 간단하겠지만 곳곳에 묻은 얼룩이 아름다워 보이는 일도 있잖아, 어쩌다 올려다본 천장 한 구석의 곰팡이에서 얼굴을 발견한다든가, 차갑고 흰 벽에 붙은 사진이나 오래 전 받았던 책에 묻은 손때라든가 그런 것까지 지워 버린다면 슬픈 일이야. 


그 녀석을 발견한 건 분명 어느 겨울 저녁 한 골목이었지, 머리에 두텁고 끈끈한 얼룩과 끈적임이 쌓였을 무렵 길바닥에서 뭉개지다 스며들 것 같았던 작은 생물을 데려다 상자에 넣어 보살폈어, 훌쩍 자라 어느 정도 보기 좋게 된 그 녀석의 가죽은 난잡하고 기분 나쁠 정도의 색채와 얼룩이 어지러워서 난 싫어하곤 했는데. 나는 흰 고양이가 항상 키우고 싶었거든.


그래도 귀여운 녀석이었어.


4.

겹겹이 주름이 진 추억 틈새에 낀 얼룩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지만, 오래된 마음일수록 조심히 빨아야 해, 세탁기는 웅웅거리고, 시끄럽고, 효율적이고, 또 무자비해서

흰 것과 검은 것

좋았던 것과 싫었던 것

추억과 기억을

함부로 빨아 버렸다간 그만 새하얗게 되어 버릴 뿐이니까. 

통, 돌아가는 통 속의 고양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라리 당신 머리를 집어넣고 돌려 버렸으면, 깨지기 쉽고 연약한 당신 머리를, 아니 몸을

안락하고 둥그런 통 속에 구부리고 말아 넣고

손가락을 빨며 뱃속처럼 천천히 돌아가는 소음 속에 몸을 내맡기고 잠들었으면, 잠들었다면.

혹은 당신과 내가 함께, 그러려면 더 크고 비싼 세탁기를 샀어야겠지만.


미안해요.


5.

모처럼 먼지가 없는 날, 봄볕에 빨래를 말렸어. 힘차게 물기를 털어 펴 빨랫줄에 하나씩, 봄바람이 불 때에, 옥상에 앉아 나부끼는 빨래를 보며 어딘가 멀리 있을 당신을 그리워하며,

지나치게 커 버린 몸을 억지로 우겨넣지 못하기에, 대신 세탁기를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기를 바라며, 우리가 담요라 이름붙인 고양이는 이불청을 붙잡으려 높이 뛰어오르고 있네, 바로 저기에.


언젠가 나도 세탁기에 머리를 밀어 넣고 세제를, 좋은 향이 나는 섬유유연제를 듬뿍 넣고 돌려 버릴지도 몰라, 언젠가, 겁이 나서 모든 것을 희게 지워 버리도록.


안녕, 내 사랑. 나의 비명은 이제 멈추었나요?

작가의 이전글 Padmasana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