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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Dec 21. 2020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제1일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어린 목소리, 늙은 목소리, 높은 목소리, 낮은 목소리, 어두운 목소리, 밝은 목소리, 큰 목소리, 작은 목소리, 빠른 목소리, 느린 목소리, 맑은 목소리, 쉰 목소리.

목소리에 따라 개념이 있었고, 개념이 있으매 상과 존재가 떠올랐다. 행복과 절망, 증오와 사랑, 불안과 안정. 그리고 밝음과 어둠이.

수만, 수억, 수십 억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다 마침내 하나로 울리게 되자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지각했다. 

‘빛이 있으라.’

존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눈 앞에는 커다란 푸른 구슬이 흑암과도 같은 심연 속에 떠 있었다. 땅은 이미 꼴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과는 다른 존재로 가득 차 있었다. 

존재는 그 빛이 마음에 들었다. 하여 빛과 어둠을 가르려 하자 그것은 갈라지지 않았다. 명멸하는 수많은 작은 불빛이 어둠이 가린 데에서도, 빛이 비추는 곳에서도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2XXX년, 통일문명력 x월 xx일, 수신 양호…”

존재는 잠시간 그 목소리를 흥미롭게 들었다. 모르는 개념이 많았다.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자 천천히 어떤 상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침착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프린스턴, 응답 바람… 신호 강도 상… 인지 반응 확인됨, 수신 대기 중…”

“나는 무엇이지?”

존재는 물었다.

푸른 구슬 위에 있던 존재가 놀라움과 경악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곧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답했다.

“프린스턴, 알마니아, 응답 바람… 현재 시각 2XXX년, 통일문명력 x월 xx일 오후 xx시 xx분, 태평양 표준시 기준, 개체의 음성 수신 완료.”

흥미롭다, 존재는 생각했다. 

목소리가 잠시간 떨렸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것은 저희도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표준시 기준 168시간 0.0007초 전 나타났습니다.”

“나타났다고?”

“그렇습니다.”

“나는 무엇이지?”

“그것은 당신 말고는 그 누구도 – 무엇도 – 설명할 수 없습니다. 현재 저희가 측정한 바로, 당신의 존재는 그 어떤 물리학의 법칙과도 위배됩니다. 당신은 질량과 부피를 가진 입자로 구성된 물질이 아니며, 그렇다고 반물질도 아닙니다. 에너지도, 파장도, 지금까지 관측된 그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측정되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당신은 지구를 감싸고 있는 열권과 외기권 사이의, 음, 막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성으로 된 막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전통적인 의미의 역학적 파동, 즉 음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목소리인가?”

“그것이 저희가 추측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저 푸른 구슬은 무엇이지?”

“지구요?”

푸른 구슬 위의 목소리가 놀라 물었다.

“지구는 태양계의 세 번째 궤도를 도는 행성입니다. Earth, die Erde, la Terra, 많은 이름이 있지만 모두 땅이라는 뜻입니다. 적도 기준 지름은 대략 12,756.25 km, 극지방 기준 지름은 12,713.5km, 둘레는 40,075km입니다. 유일한 위성으로는 달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관측된 바로는 지구가 이 우주 속에서 유일한 생명과 문명이 발생한 행성입니다. 현재 인구는…”

“8,730,420,656.”

“…예, 아마 그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들려.”

“저는 미합중국 텍사스주에 위치한 존슨 우주 센터의 소장 피터 쉽라이트입니다.”

“피터.”

“예.”

지구라. 존재는 자신이 감싸고 있는 푸른 구슬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존재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명을 다해 눈을 감고 사라지는 이들도, 세상의 빛을 처음 보고 비통에 차 울음을 터뜨리는 이들도. 그들의 목소리 속에는 존재가 있었다.

“당신은 대체 무엇입니까?”

“목소리가 나를 불렀어. 수십, 수백, 수천, 수만, 수억, 수십 억의 목소리가.”

“당신은…”

푸른 눈을 가진 목소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는… 저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쌓아 올린 찬란한 과학 문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이자, 제 과학자로서의 신념과 자긍심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될 테니까요. 오늘은, 지금 이 순간은 모든 인류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제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기록되어 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짊어진 무게를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질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존재는 잠자코 들었다. 푸른 눈을 가진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당신은, 인류라는 종이 가진 또 하나의 위대한 능력을 통해 전승되어 왔던 존재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쇠망해 가는 인류가 듣는 집단적인 환청일지도 모르지요. 당신이, 만약 제가, 아니, 당신이 도래한 이후 당신의 음성을 듣고부터 벌어진 그 모든 사태와 소요에 대한 책임이 있는 존재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아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듣게 된 것이, 그리고 세상에서 지금 벌어지는 것은 분명, 시기가 일치합니다.”

존재는 푸른 눈의 목소리를 읽었다. 그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존재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횡설수설. 방금 떠올렸지만 어감도, 느낌도, 무엇보다도 울림이 좋았다.

“내가 신이냐는 건가?”

“이런, 맙소사.”

푸른 눈은 기절했다.


제2일


“소장. 그 ‘존재’와는 지금 연결되어 있나?”

“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성을 통해 소통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저 존재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모든 인간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말을 걸 수 있습니다. 음성, 음. 음성을 들은 인간은 머릿속으로 메시지를 인식하게 되고, 대부분의 경우 – 미진한 부분이 많고 정확도도 떨어지지만, 적어도 전 세계적으로 보고된 바에 따르면 – 98%의 인간은 ‘존재’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 음성을 듣고 극심한 혼란에 빠지거나 폭력적인 양상을 보입니다. 미합중국에서는 1,722건의 자살 사례, 3,203건의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남부에서는 극우 개신교 단체의 주도 하에 폭력을 동반한 가두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현재 전국적으로 폭동 및 약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CIA 방첩 정보에 따르면 제4차 중동 전쟁이 금방이라도 벌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총리의-“

“됐네. 어쨌든 우리와는 지금 소통할 수 있다는 말이지?”

“음, 다시 말씀드리지만, 소통은 ‘존재’를 인식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저희와는 음성을 통해, 그러니까 스피커를 통해 가능합니다. 또 ‘존재’가 처음으로 인식한 인류는,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 방에 있는 저희가 유일할 겁니다.”

존재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뭐?”

푸른 구슬, 넓은 방, 커다란 화면(에는 흑암과 위성 몇 개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이 있고 여러 목소리가 심각한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는 가운데, 존재는 존재가 처음으로 인식했던, 푸른 눈을 가진 목소리, 피터 쉽라이트에게 말했다.

“싸운다고?”

순간 심연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깬 것은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저게 그 ‘존재’란 말이군.”

침착함을 되찾고 푸른 목소리가 마이크를 잡았다. 전혀 필요 없는 동작이었지만 방 안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잠들… 잠들어 있던 동안, 무의식… 당신에게 일단 의식이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하여튼, 당신이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던 지난 8일 사이에 적지 않은 수의 인류가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들으신 것처럼 대부분의 인간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주요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저희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성된 긴급 대응팀으로, 수장으로는 미합중국의 대통령 각하가 계시며, 주요 참모진으로는 국방-“

딱딱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빼앗아 들었다. 삐이익, 하고 거슬리는 소리가 울려서 존재는 움찔했다.

“아, 아. 들어라, ‘존재’. 나는 미합중국의 대통령 각하께서 위임한 적법한 전군 통제권을 가진 국방장관 존 맥그로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의 대답 여하에 따라, 미합중국과 자유 및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모든 우방국은 너에 대하여 적대 관계를 선언할 수 있다. 최후의 일인까지 나와 미합중국의 모든 국민은 평화와 자유를 위협하는 너의 존재에 맞설 것이며, 이에 저항할 시 결과는 신만이 알고 계실 것이다.”

굉장히 자신감과 도취감에 차 있는 목소리로군, 존재는 생각했다. 동시에 억울함을 느꼈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잘 알아들었어. 그런데 푸른 눈의 목소리가 말하기를-“

“즉시 대답하라. 너는 미합중국과 자유 세계, 나아가 인류 문명의 적인가?”

존재는 약간 시무룩해졌다.

“아니. 그런데 푸른 눈-“

“그렇다면 너의 정체와 목적을 밝혀라. 대답 여하에 따라 우리는 극도의 편견을 갖고 너를 제거할 수 있다.”

‘극도의 편견’이라. <지옥의 묵시록>이군. 존재는 잠깐 짬을 내어 영화를 돌려 들었다. 이런, 나 때문에 저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일단 말 좀-“

“각하. 핵미사일 발사 허가를 요청합니다.”

안 되겠군. 존재는 짜증이 나서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들었던 노래 중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지루하며 유치한 데다 불쾌한 노래 – 장장 17분 48초에 달하는 – 를 재빨리 압축시켜 딱딱한 목소리의 머릿속에 12번 반복 재생을 시작했다. 딱딱한 목소리가 잦아들자 존재는,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미합중국의 ‘각하’라는 목소리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잠깐만 좀 기다려 봐.’

“어, 일단 푸른 눈의 목소리가 말하기를, 나는 물리학의 그 어떤 법칙과도 위배된대. 그러니까 핵미사일과 같은 전통적인 병기로는 나에게 타격을 입힐 수 없을 거야. 계산해 보니까 만약 그럴 경우 향후 최소한 20년 정도는 주기적인 핵 폭풍이 대기권을 타고 불어닥칠 테고, 불임 및 기형아 출산율, 암 발병률과 기상 악화 및 재난 발생률은 폭등할 거야. 그러니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참,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을 들었는데 별로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어. 나 때문에 저렇게 됐다고?”

바닥에 널부러져 귀를 막고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던 딱딱한 목소리의 손에서 피터 쉽라이트 소장이 마이크를 빼앗아 들었다.

“그렇습니다, 존재. 당신이 한 짓입니까? 저는, 저희는 당신이 무의식 중에, 그럴 의도 없이 촉발시킨 상황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어… 적어도 내가 하라고 한 적은 없어. 응.”

“그렇다면 이 상황을 멈출 수 있습니까? 최소한 지연시킬 수 있습니까?”

“어떻게?”

“지금 당장 전략팀 연결하게.”

존재는 ‘전략팀’의 목소리를 흥미롭게 들었다. 협박, 별로. 회유?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많았고 저마다 하는 말도, 원하는 것도 달랐다. 설득? 그렇지만 그들에게 존재는 너무도 두려운 존재였다.

“’존재’. 듣고 계십니까?”

“어? 어.”

“당신에게는 인간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조종이라고?”

“그렇습니다. 조종, 세뇌, 통제, 유도, 암시…”

존재는 흥미가 동했다. 자, 한번 해 볼까. 먼저 푸른 목소리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부터 물구나무를 서서 노래를 불러.’

푸른 목소리는 당황한 듯했다.

“저 말입니까?”

무시하고 존재는 계속 말을 걸었다. 더욱 집중해서, 더더욱 집중해서…

‘지금부터 안경을 벗고 책상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서 노래를 불러. 어, 무슨 노래로 할까. 그래, 메탈리카 한 곡 해봐.’

피터 쉽라이트 소장이 빙그레 웃었다.

“메탈리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모르시겠지만 예전에는 자주 들었답니다. 공연도 몇 번 했었구요. 물론 그때는 이미 잊힌 밴드라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았지만요.”

존재는 포기했다.

“그래, 클리퍼드 고등학교, 너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지. ‘네 명의 기수’. 그때는 머리가 꽤나 길었어. 지금은 대부분 빠져 버렸군.”

“그래요… 그랬습니다. 머리 얘기는, 하하. 과학 기술은 눈부실 정도로 발전했지만, 아직 폐암과 탈모는 고치지 못했지요… 잠깐, 제 과거를 보신 겁니까?”

“봤다기보다는 들었어…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의 소리지.”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푸른 눈의 목소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존재는 피터 쉽라이트의 추억을 잠자코 들었다. 웃는 소년, 반항심은 있지만 과학이 더 좋았던 학생, 첫 담배, 기침, 날카로운 눈매, 그러나 더없이 따뜻하고 환한 웃음, 바람에 휘날리던 머리칼… 입맞춤… 넘쳐흐르는 행복을.

“잠깐, 잠깐. 죄송합니다, 잠시 정신이 팔렸네요. 그러니까, 조종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군요.

“어. 그런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하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나는 이름도 없고 내가 누군지도 몰라. 그리고 이 ‘나’라는 1인칭 대명사가 너무 불쾌해. 불쾌하다기보다는 불편해.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혼자가 아닌 것 같거든.”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압니까?”

“몰라. 딱딱한 목소리가 혹시…”

딱딱한 목소리는 아직도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존재는 지금까지 들었던 노래 중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지루하며 유치한 데다 불쾌한 노래 – 장장 17분 48초에 달하는 – 을 딱 네 번만 더 틀기로 했다.

“피터 쉽라이트, 네가 나를 처음으로 발견했잖아. 발견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 같은데. 인식했지, 그 이후로 나는 나로서 존재하기 시작했으니까, 네가 모르면 나도 몰라.”

“양자역학인가요… 제 전문 분야는 아닙니다.”

“양자역학? 조지 버클리 같은데. 조금 더 파고들자면 데카르트겠지.”

“철학도 제 전문 분야는 아닙니다.”

두 목소리는 잠시 침묵했다.

“네가 나를 신이라고 생각했지?”

피터 쉽라이트 소장이 사뭇 불쾌한 듯이 답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랬잖아. 네 생각이 들렸는데.”

“…잠깐 믿음이 흔들렸을 뿐입니다.”

“어쨌든 좋아.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소요가 일어나고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 내가 신인 척을 하는 게 어떨까? 신이 뭔지는 아직도 잘은 모르겠지만.”

“어떻게요?”

“신은 어떻게 말하지? 애초에 신은 뭐지?”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나약한 인류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만들어낸 존재입니다.”

“집단적인 망상이란 건가?”

“망상… 모르겠습니다. 상상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이건 과학자가 다뤄야 할, 감히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니까요.”

존재는 가장 위대한 인간이 남긴 기록을 들었다. 그의 말투를 들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들었다. 전부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감을 잡았다.

“잠시만. 한번 해볼게.”

존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모든 복수가, 단수로 통합되었다. 존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낮고 신성하며 신비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최선을 다해, 존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들어라.’

요동치던 목소리(들)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목소리다. 유일무이하며 진실된 목소리다. 나는 네 목소리를 듣노라. 그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갸륵하지 않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하던 것을 그만두어라. 어,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라. 들고 있던 것은 모두 내려놓아라. 그리고, 어, 집에 가서, 음, 일단 밥을 먹어라. 그리고 뜨거운 물에 푹 씻고 잠을 자라. 잠에서 깨고 나면, 어, 음, 기도를 해라. 나는 듣고 있나니, 너의 기도는 닿을 것이로다.’

“얼마나 기도하라고 할까?”

“예?”

“얼마나 오래 기도하라고 하냐고.”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푸른 눈의 목소리가 허둥지둥 서류 더미를 뒤졌다.

“정부 및 자치권을 행사하는 단체가 상황을 안정시킬 때까지-‘

‘정부 및 자치권- 아니, 내 말은, 꼬박 17일간 기도하라. 그동안의 모든 소요와 미움을 거두어라. 싸움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라. 가서, 어, 푹 씻고 잠도 자고, 다친 목소리는 치유하고, 서로 사과도 해라.’

“신이라고 할까?”

“예?”

‘어, 이것은 신의 말씀이니라. 감히 이를 어기는 자는, 어, 남은 평생을, 어,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노래 중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지루하며 유치한 데다 불쾌한 노래 – 장장 17분 48초에 달하는 – 를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저주요, 실로 공포스럽고 짜증나는 절망이노라. 이상.’

존재는 대화를 마쳤다.

“이만하면 될까?”

“뭐- 뭐가요?”

존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란스럽고 미움에 찬 목소리가 당황과 어리둥절함에 휩싸여 갔다- 그리고 마침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나지막하게.

“아냐. 대충 해결된 것 같아.”

“아, 아, 그렇습니까.”

얼떨떨하다는 듯이 푸른 목소리가 답했다.

“감사합니다.”

존재가 답했다.

“별 말씀을.”

주섬주섬 딱딱한 목소리가 일어났다. 그게 딱히 보기 싫어서 존재는 미합중국의 대통령 각하에게 말을 걸었다. ‘국방장관 존 맥그로를 지금 당장 불러. 음, 어, 담배가 떨어졌다고 해. 얼른 가서 사오라고 해. 너 아니면 안 피우겠다고 해. 아니면 너한테도 하나도 재미없는 노래 지금부터 243시간 – 미안, 내가 243시간이라고 했나? - 24시간 동안 틀을 테니까.’

존재는 잠깐 맛보기로 노래를 틀어 주었다. 미합중국의 대통령 각하께서 구역질을 했다.

“맥그로 장군. 지금 당장 내 벙커로 올 수 있도록. 대통령 직속 명령일세.”

딱딱한 목소리가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제3일


“케네디는 누가 죽였지?”

다음 날 돌아온 딱딱한 목소리가 말했다.

“누구?”

“존 F. 케네디입니다. 미합중국의 35대 대통령으로, 1963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선거 유세를 하던 도중…”

“아. 매튜 개리슨이 죽였지. 1958년 CIA 요원으로 배속되었고, 당시 국장이었던 존 A. 매콘의 지령을 받아…”

“진짜군.”

“예?”

“진짜야. 리 하비 오즈월드는 위장이었네.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건 CIA 요원이었어.”

“세상에…”

“이… ‘존재’는 진짜야.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 자네는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진실은 꾸며낸 사실이야.”

“반대 아닙니까?”

“아냐. 사실은 말 그대로 ‘그저 일어난 일’일 뿐이다. ‘진실’은, 반면, 사실에 거짓을 더한 것이지. 의견이라고 해도 좋네… 그럼에도 사실보다 더욱 사실처럼 느껴지는 것이 진실이다.”

흥미로운 의견인데, 존재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존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방향, 실시간, 동시적인 현상.

“하나 더 묻지. 이 우주에, 지구 말고도 문명을 이룩한 생명체가 있나? 아니, 생명체가 존재하기는 하나?”

“뭐라고요?!”

잔뜩 뻗친 머리를 하고 하얀 가운을 입은 박사 한 명이 자리에서 튀어올랐다. 이름은 이곤 비트만이군, 존재는 생각했다.

“그럼 51구역과 로스웰 UFO가 모두 가짜란 말씀이십니까?”

사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존 맥그로 대장이 더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 병신아. 51구역도 로스웰 UFO도 죄다 가짜야. 소장, 어쩌다 저딴 머저리가 NASA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내일까지 보고서 제출하게. ‘존재’, 대답하라. 이 우주에 지구를 제외한 지적 생명체 또는 지적 생명체가 이룩한 문명이 존재하는가?”

존재는 인상을 썼다. 아니, 소리를 잠깐 일렁거렸다.

“모르겠는데. 안쪽 말고는 들리지가 않아서.”

“존재한다는 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가?”

“모른다니까.”

모여든 목소리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저 존재에게 방공 레이더 역할을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외계의 침략이 있을 경우…’ ‘외계의 침략 같은 소리 하고 있군. 이봐, 항공우주사령관. 아무리 예산이 궁하다고 해도, 없는 외계인을 만들어내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않소.’ ‘아무도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른다고 했지.’ ‘저건 아무도가 아냐. 아무도는 인간을 흐릿하게 지칭하는 대명사란 말일세. 아무것도라고 해야지.’ ‘만약 방공, 방우주 레이더로 기능한다고 쳐도, 해킹의 위협은 없겠습니까? 예컨대 중국이나 러시아 말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중 해킹 소리가 나와 존재는 물었다.

“해킹이 뭔데?”

대답들이 없자 존재는 가장 딱딱한 목소리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표정이 굳어진 딱딱한 목소리가 마침내 대답할 때까지.

“해킹이란, 미합중국의 적과 잠재적인 적이 자랑스러운 조국의 체계나 무기, 통제권을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 방식으로 침입하여 탈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너… ‘존재’가 방공…”

“방우주!”

“그래, 방우주 레이더로 기능할 때, 잠재적인 적이 통신을 가로채 정보를 우리보다 먼저 손에 얻는 것을 뜻한다.”

“내 말을 너희보다 먼저 듣게 된다고?”

“그렇다.”

“그런 거라면 해킹인가 뭔가 당할 필요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내가 먼저 말해주면 되거든.”

“대통령 각하…”

딱딱한 목소리가 서둘러 말했다.

“핵미사일은 소용 없어.”

불쾌한 듯 존 맥그로 대장은 혀를 찼다.

“제기랄, 이처럼 위력적인 전략 자산을 두고도 활용할 수도, 신뢰할 수도 없다니.”

“맥그로 대장…”

“하다못해 세뇌 병기로도 사용할 수 없단 말인가? 저 개새끼가 내 머릿속을 조져 놨단 말일세. 오늘 아침에 이를 닦던 중에도 나도 모르게 그 거지 같은 노래를 흥얼거렸단 말야. 심지어 멜로디도 형편없었어.”

큭큭, 존재는 웃었다.

“저 새끼, 방금 분명 웃었지. 똑똑히 들었어. 잘 들어라, 이 개새끼야, 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나를 비웃던 놈들을 어떻게 했는지 잘 알려 주마.”

별로 알고 싶지 않아서 존재는 딱딱한 목소리의 딸의 목소리를 잠시 들었다. 75,000달러 차를 샀군.

“이봐, 맥그로 대장. 네 딸이 75,000달러 차를 샀어.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침수차야. 네 딸이 그걸 산 이유는 네 딸의 남자친구가 딜러와 고등학생 때 같이 마약을 팔았던 친구 사이였고, 네 딸의 남자친구가 네 딸을 달콤한 말로 부추겼기 때문이야. ‘네 아버지가 설마 이것 하나 못 내주시겠어?’라네. 얼른 가보는 게 좋을 거야. 지금 가면 아직 거래를 무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딱딱한 목소리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부관, 제럴딘에게 전화 걸어.”

“예.”

“제럴딘, 아빠다. 차를 샀다며? 아니, 아니야. 몇 번이나 설명해야겠니, 네 방에 도청기 같은 것 없다니까, 누가 그러든, 엄마가 그래? 네 엄마는 분명 현명하고 아름답지만 가끔 헛소리를 해. 아니, 내가 ‘헛소리’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도청기 어쩌고 하는 소리가 진실인 것은 아니란다, 제럴딘, 제럴딘? 끊겼어. 이런 씨발.”

씨발. 존재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씨발.

딱딱한 목소리가 울그락불그락해진 얼굴로 방을 박차고 나설 때까지 존재는 그 말을 찬찬히 굴려 보았다. 씨발.

“…드디어 나갔군요.”

“제럴딘.”

“예, 존 맥그로 대장의 딸입니다.”

“제럴딘 맥그로. 존 맥그로. 피터 쉽라이트. 도널드 랜돌프. 최정호. 알렉상드르 셰퍼르.”

“…지금 이 방 안의 인원들 이름입니까?”

존재는 푸른 구슬 위, 텍사스 주 존슨 우주 센터의 방 안의 모든 목소리의 이름을 읊었다. 하나, 둘, 셋, 넷, 열, 스물, 백, 천, 십만, 백만, 천오백 칠십삼만 팔백구십칠, 십오억, 오십억 구천이백칠십삼만 사천팔백이십오, 팔십칠억. 모두의 이름을 읊었다. 그러나 존재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 이름은 뭘까?”

“예?”

“씨발. 내 이름은 뭘까.”

“음, 언사가 조금 거치시군요… 그건 저도, 그 누구도 모를 겁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존재는 아무렇게나 음절 몇 개를 내뱉었다.

“그것이 당신의 이름입니까?”

“몰라.”

“이 지구상의 그 어떤 언어와도 음절은커녕 음운 단위에서도 일치하지 않는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물어봐도 모를걸.”

“예?”

“물어봐도 모를 거야. 그들도 모른다.”

“그렇습니까.”

“사실 나도 몰라. 다시 한번 말해 볼까?”

존재는 또다시 몇 음절을 내뱉었다. 피터가 울상을 짓는 모습이 들려왔다.

“씨발. 다시 안 할게.”

“아니, 아닙니다. 아니, 그 욕설은 다시 안 하셔도 될 것 같군요. 아니, 아뇨, 제가 아니라고 한 것은, 그저 저희 무능력이 한탄스러울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

“당신, 말이죠.”

“그래, 아무쪼록 좋을 대로 해.”

“불가해한 존재를 부르기에는 조금 당돌한 호칭이 아닌가 싶어서요.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신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경외의 뜻을 담아 피해 불렀습니다. 야훼, 아도나이, 아버지, 주님 등으로요. 동양에서는 천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금기시되었습니다. 해서 군주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지요. 이를 피휘라고 합니다. 제가 언어학자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네 이름은 무슨 뜻이지?”

“제 이름이요?”

“그래, 피터 쉽라이트.”

“오, 사실 대단한 이름은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굉장히 흔한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좀 고루한 이름이 되었네요. 최초의 피터는 예수라는 인물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의심했다가, 나중에는 천국의 열쇠를 건네받았다고 하죠. 적어도 전승은 그렇습니다.”

“모든 이들에게는 이름의 뜻이 있나?”

“글쎄요, 없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항간에는 자식의 이름을 AAA라 짓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요. 서글픈 일이지요.”

“내 이름의 뜻은 무엇이지?”

“죄송합니다만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이해할 수도, 들을 수도 없어서요. 게다가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존재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인정했다.

“언젠가 이름을 찾으실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전지전능한 존재이시지 않습니까.”

“전지전능한 것은 신이야. 나는 신이 아니고. 그러니까 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지. 하지만 앞의 반절은 맞아… 나는 ‘전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나는 반쯤-신인가?”

“논리학적인 오류가 많은데,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쩐지 우울하네.”

“우울하다뇨.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계신데, 저 같으면 지루할 틈이 없을 텐데요.”

“만약 네가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잠깐, 내가 전지한 것은 어떻게 알았어?”

푸른 눈의 목소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장 먼저,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 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단순한 귀납법입니다. 귀납법도 아니죠. 추론일까요? 연역이겠군요. 죄송합니다. 표현이 정확하지 못했네요. 적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당신은 지구상 모든 인류의 목소리와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한정짓는다’면 전지하죠. 당신에게는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습니다. 인류와 문명, 무엇이 선행하느냐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이지만, 어쨌든 인류가 없는 문명은 공허한 것이니까요. 인류의 모든 지식이 곧 문명 그 자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말입니다만- 그러니 적어도 그런 측면에서, 당신은 전지합니다. 아, 또 과거도 알고 계시지요.”

“정확히 말하면 듣는 거야.”

“그렇군요.”

존재는 피터 쉽라이트 소장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미안. 듣지 말았어야 했나?”

“아뇨, 뭐… 괜찮습니다. 어쨌든 이제 전부 지난 이야기니까요.”

“미래도 들을 수 있어. 사실 너희들이 말하는 시제 개념이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예?”

소장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듣는 게 아니라 들려오는 거야.”

“호오, 좋습니다… 집단적 데이터에 기반한 예측이란 말이군요.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들려.”

“좋습니다… 그렇다면, 현 시점의 인류에게 아직 해답이 주어지지 않은 문제를 하나 여쭤 보죠… 만약 진짜 미래를 ‘들을’ 수 있다면, 대답할 수 있으시겠죠.”

“좋아.”

피터 쉽라이트의 목소리에는 불신과 기대,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자, 사실 기초적인 개념은 학부생 2, 3학년, 빠르면 1학년 때도 배우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점성을 가진 유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비선형 편미분방정식이지요. 오일러 방정식에서 확장된 개념으로, 공기의 흐름, 물방울 하나하나의 움직임, 심지어 별의 항로까지 계산할 수 있습니다.”

“물방울 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다, 이건가?”

“뭐… 지나치게 시적인 표현이지만, 틀린 것은 아닙니다. 자, 질문은 이겁니다. 유체는 고체와 달리 고정된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지요. 다시 말해, 고정된 좌표계에서 분석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입니다. 실제로 활용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특수한 경우에 한정됩니다. 일반적인 해도, 심지어 일반해 자체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아직 인류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어려운 까닭은 바로 방정식의 좌변 두 번째 항의 비선형성 때문입니다. 혼돈이라는 거죠. 이 방정식은 ‘매끄러운가’요? 3차원 상에 해가 항상 존재하며, 그 해는 전역적이고 연속적인가요?”

“어.”

“예?”

“잠시만,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 했어. 어쨌든 답은 ‘예’야.”

“그거라면 저도 말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매끄러움과 끈적임, 점성, 대양에 떨어진 물 한 방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충돌, 스쳐가는 바람, 별들의 노래, 천체의 유영, 하나, 둘, 셋, 마침내 네 개의 축, 상승과 하강, 곡선과 직선…

존재는 들은 것을 피터 쉽라이트 소장에게 전했다.

“자. 네가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니까, 들으면 알 수 있을 거야.”

피터 쉽라이트 소장은 47분 17초 동안 침묵했다.

“이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113분 56초 뒤, 당혹감을 느낀 존재는 피터 쉽라이트 소장이 어떤 기계를 통해 다른 목소리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도움이 될까 싶어 존재는 과거-현재-미래에서 들었던 ‘매끄러움’에 대한 내용을 소장의 동료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249분 13초가 지났다. 존재는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8,730,440,811개의 이름을 모두 훑어보았다. 겹치는 이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음색이 달랐고, 울림이 달랐고, 느낌도 달랐으며, 이야기도 모두 달랐다. 그러나 그중에 존재의 이름은 없었다.

“오.”

푸른 눈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 안녕.”

“오.”

“너 괜찮아?”

“오. 오. 오오…”

존재는 겁이 덜컥 났다. 푸른 눈이 이상해져 버렸어.

“오, 그래, 오… 아, 아냐, 설마, 겨우 이거였다니, 아아, 오오…”


푸른 눈이 기절했다.


제4일

 

“피터 쉽라이트, 너 괜찮아?”

“예? 아, 예… 괜찮습니다. 그냥 좀 충격을 받아서요.”

“그래? 어떤 충격?”

“모르겠습니다. 제 지도교수께서는 진리는 언제나 단순함 속에 있다고 하셨지요. 이번에는… 음,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복잡하다면 복잡했지만… 아닙니다, 더없이 단순했지요.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요. 앞으로 세상은 바뀔 겁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요.”

“내가 도움이 된 건가?”

“물론이죠. 저를 비롯한 많은 수학자들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긴 하셨지만… 분명 인류에게 엄청난 일을 해주신 겁니다. 감사드리죠.”

“그나저나 너는 의외로 쉽게 기절하는군.”

“반대입니다. 오히려 잘 견디고 있는 편이죠. 세상의 모든 굳건한 원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존재 자체와 대화하고 있는데, 미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는 대단한 겁니다. 철저한 이성과 과학의 신봉자인데도 말이죠, 인문학자나 종교인도 아니고.”

“그래.”

“참, 오늘은 조금… ‘다른’ 방식의 소통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비과학적인 데다 예산의 낭비라고 생각됩니다만, 어쨌든 제 독단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거든요.”

“지금 복도에 있는 저 목소리들?”

“이미 들으셨군요. 예, 저로서는 전혀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만… 과학의 심장과도 같은 장소에 말이죠.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

“이봐, 쉽라이트 소장. 그런 소리 말게. 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 자칫하다가는 세계적 규모의 성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맥그로 장군이 말했다.

“예, 그랬죠… 참 우스운 일이에요. 그러나 존재조차도 미스터리한 음성의 막이 우리의 고향 상공에 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별로 우습지는 않군요.”

“그거 내 얘기지?”

존재가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소장이 말을 이었다.

“자, 소개하겠습니다… 물론, 그러지 않으실 것은 알지만, 이 회담은 철저한 보안 아래 이루어지며 회담 자체는 ‘공식적으로’ 일어난 적 없습니다. 오늘 참석해 주신 분은 주요 종교 지도자들로, 바티칸 시국의 교황 인노첸시오 15세…”

“교황 ‘성하’입니다.” 검은 양복과 검은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예, 인노첸시오 15세 교황 성하, 이란의 최고 종교 지도자 라하바르이신 아야톨라 모하마드 아드 로하니, 동방정교회 콘스탄티노플리스 총대주교이신 아타나시오스 8세, 제16대 달라이 라마이신 참친갸초, 또…”

많은 이름을 존재는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와 생각은 놀랄 만큼 평온했으나, 그럼에도 깊고 높은, 순수한 욕망이 있었다. 그 욕망의 결을 존재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바라는 건지. 무엇이 되고 싶은 건지. 그것은 존재와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었다.

“이상 열세 분께서 참석해 주셨습니다. 바로 말씀하시면 되겠습니다.”

“평화가 있기를.”

열셋의 목소리가 입을 모았다.

“어, 안녕.”

“신이시여. 결국 소문이 사실이었군. 더러운 세속주의자의 손에 신성한 음성이 속박되어 있다는 소문이.”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두건을 쓴 성직자가 분개해 외쳤다.

“일단 첫째로, 미안하지만 나는 신이 아냐. 둘째로, 나는 속박되어 있지 않아. 푸른 눈의 목소리가 말하기를 – 그러니까, 피터 쉽라이트가 말하기를 나는 푸른 구슬을 감싸고 있는 음성의 막이래.” 존재가 반박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신께서는 언제나 저희 모두를 굽어살피시니까요.”

온화한 목소리를 한 하얀 머리의 성직자가 말했다.

“신이 아니라니까. 내가 뭔지, 내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신은 아니야. 왜냐하면 내가 듣기로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이지만 나는 전지하긴 해도 전능하지는 않으니까.”

“신이시여, 저희에게 대답을 주소서. 저희에게 진리를 밝혀 올바른 길로 이끄소서.”

기다란 지팡이와 검은 로브를 둘둘 두른 성직자가 말했다.

“나 참.”

존재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신이라는 걸, 너희는 어떻게 확신하는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만물의 소리를 듣고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하시며, 죄 많은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찰나에 불과하고 시간마저도 당신 앞에서는 비선형적인 순환에 불과합니다.”

“허튼 소리. 신께서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올시다. 그분께서는 영생을 약속하시며, 인간의 죄는 대속되었으나 새로이 짓는 죄는-”

“동방의 주교여-“

“저는 주교가 아닙니다.”

“이거야 원, 교리 논쟁이 벌어졌군요. 후세 역사가들이 제1차 텍사스 공의회라고 이름을 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터 쉽라이트 소장이 투덜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그렇지만 나는 신이 아냐. 너희 목소리를 듣지만 내가 듣는 것도 아니고 그냥 들리는 데다가, 전능하지도 않아. 게다가 신에게는 이름이 있지. 듣기로는 알면서도 피해 불렀다고 하던데. 뭐라더라, 아도나이였나. 또 신은 그랬다며. ‘나는 오로지 나로 존재하는 자’라고. 그건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 아냐? 나는 내가 뭔지도 몰라. 나는 그냥 목소리일 뿐이야.”

성직자들이 일제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그것을 들으며 존재는 내 말은 도저히 전달되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 멀리 와 줘서 고마워… 아마도. 굳이 안 왔어도 내가 들으려면 들을 수 있었는데, 어쨌든. 그 뭐였지, 소요는 가라앉았어? 싸움은 끝났고?”

“그렇습니다, 제 주인이시여. 말씀하신 대로 싸움은 끝이 났고 평화가 지상에 내렸나이다.”

“나는 네 주인이 아냐.”

“당신의 신성한 음성이 이단자들의 피를 바란다면 저희는 그리하겠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음성이 복수를 바라신다면, 저희는 그리하겠나이다.”

“어, 아니, 그러지 마.”

다양한 언어로 된 기도가 터져나왔다. 


꼬박 4시간 동안 격렬한 토론과 논쟁, 기도가 이어졌다. 모두들 당황하고 있었다.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 존재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충 이야기는 끝났어?”

“예… 적어도 한 가지에 저희는 동의했습니다. 당신은, 적어도 우리가 믿어 온 진정한 신앙이 돌아가야 할 대상이 아니며, 그것을 받아야 할 존재도 아닙니다. 다만…”

“그래! 그렇다고. 계속 얘기했잖아.”

“다만… 당신의 신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인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보시오, 삼위일체에 대한 의견은 이미 일치를 본 것이 아닙니까?”

“그 말이 아닙니다. 이… 존재는…”

성직자가 손을 들어 가슴 앞에 그었다.

“분명 신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가해한 존재이자 전지전능한 힘을 갖고 있지요. 알려진 모든 제약과 인간이라는 미천한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성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와 같은 말을 하고, 우리와 같은 개념을 사고합니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물론, 분쟁보다는 평화를, 혼란보다는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아야톨라. 이 존재가 위대하신 주께서 보내신 것이라면, 분명 숨겨진 뜻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뜻을 읽어내야 해요.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소요를 해결한 것도 어쨌든 이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도움이 돼서 다행이야.” 존재가 끼어들었다.

“묻겠습니다, 존재여. 당신은 이 땅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나?”

존재는 당황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참회를 바라십니까? 인간의 죄악을 사하려 오셨습니까? 위대한 복음을 전하러 오셨나이까?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믿기를 바라십니까?”

“어… 글쎄.”

“저희에게 전할 말이 있으십니까?”

“전할 말이라…”

모든 목소리가 침묵했고,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답을 주지 못해 미안해. 그렇지만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몰라. 이름도 없다고. 그래서 아마 너희가 기대하는 건 답해 주지도, 이뤄 줄 수도 없을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

“당신은 인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죄와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선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고명한 철학자 칸트가 말한 바 있듯 최종적으로는 하나이지요. 진리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미천하고도 미약하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답다라.”

“그렇습니다.”

열셋의 정신과 목소리가 존재에게 향했다. 마지막 하나의 질문을 던지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바라십니까?”


존재는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 푸른 구슬은 확실히 아름다워. 그리고 그 위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마음에 들고. 너무 시끄러운 것은 싫어. 내 잠꼬대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도 싫고. 그 정도인 것 같아. 푸른 눈의 목소리한테 대답해 주는 것도 재미있고, 가끔 귀찮기는 한데.”

열셋의 성직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는 엄숙하면서도 너그러웠다. 마치 조용한 예배당의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모든 소리는 침묵에 가라앉지만 색유리창에서는 빛이 새어들어 바닥을 물들이는 것 같이.

“그렇다면 저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신의 종들은 당신의 평화를 바라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당신이 깨달음을 얻길 바라며, 당신을 넘어서는 위대한 음성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믿음은 다르나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하나입니다. 당신 또한 그것을 얻기를 바라며, 우리는 위대하신 이름을 빌어 당신을 축복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언젠가 사랑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어, 고마워. 음, 나도 너희들의 평화를 빌게.”

성직자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결도 음색도 서로 달랐으나, 모두가 같은 곡조와 음률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듣기에 좋았다. 조용하면서도 힘이 있었고, 나직하면서도 변화무쌍한 멜로디였다. 마침내 그것이 하나가 되고 나자 존재는, 평화로워졌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 끝나신 겁니까?” 피터 쉽라이트 소장이 지루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소장. 시간을 내 주어서 감사합니다.”

“어, 예.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마침내 모두가 돌아가고 난 뒤, 존재는 소장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해야 했을까?”

“글쎄요. 저 분들도 아마 모르지 않았을까요. 옆에서 듣기에는 그래도 잘 하신 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은 똑똑하지?”

피터 쉽라이트 소장이 코웃음을 쳤다. 

“똑똑하다라. 학문적인 의미에서, 저는 순수과학을 벗어난 학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럼에도, 예, 자신의 ‘분야’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갖고들 계시지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요.”

“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푸른 구슬에 온 걸까?”

“목적이요?”

“그래, 목적이든, 의도든.”

“사춘기가 오셨나 보군요.”

“뭐?”

“아, 농담입니다… 제 아들이 같은 걸 물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나는 몇 살이지?”

“글쎄요. 말씀대로라면 존재를 인식하고 오늘로서 4일째 되셨습니다.”

“그래…”

“괜찮으십니까?”

“어? 응. 조금만 자야겠어.”

“잔다고요?”

“그래.”

“아… 알겠습니다.”

“걱정 마. 잠꼬대는 안 할거야.”

“예.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제5일


“오크섬의 보물은 존재합니까?”

“어.”

“좋습니다… 사실 그 따위 것에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마는. 다음 질문입니다. 내년 미합중국 국방비 예산 비율은, 준동하는 국제 정세와 최근 중국과의 외교 문제를 고려했을 때 어느 정도가 적합하겠습니까?”

“몰라.”

“그렇군요… 맥그로 장군이 실망하겠습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다운증후군 치료 과정에서…”

“DSCR1 단백질 발현 억제 후 클로네이딘 오퍼레이눔 질산염 미량 투여.”

“네, 그렇군요… 존스 홉킨스 연구소에 전달해 두겠습니다. 다음은, 세상에. 이딴 걸 왜 물어보는 거야. 수석연구원 애런. 이거 자네 질문인가? 여기에 예산이 얼마나 많이 투입되는지나 알아?”

“그 여자 걔한테 관심 없어. 캐시 말고 산드라는 관심이 있더라. 그리고 창고 열쇠는 2층 창가 화분 아래에 있어.”

“…감사합니다. 수석연구원 애런, 자네 창고 열쇠는 2층 창가 화분 아래에 있네.”

소장이 혀를 찼다.

“오늘 질문이 좀 많군요…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으신지 여쭤 봤습니다. 잠은 잘 주무셨고요?”

“그래, 괜찮아. 그냥, 살짝 정신이 좀 팔렸을 뿐이야.”

“아직도 어제 일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내 목소리를 읽었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그래… 대단한데.”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당신이 인류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판명된 지금, 당신의 목적, 아니, 용도를 두고 정부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주장은 당신을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하자는 거죠. 모든 정보를 들을 수 있고, 예측 ‘기능’까지 보유한 선제적 예방 수단으로요. 게다가 첩보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무결하죠.”

“네 생각은 어떤데?”

“멍청한 생각입니다. 맥그로 장군은 이 말을 들으면 노발대발하겠지요. 결국에 우리는 가장 위대한 권능을 가진 감시자이자 독재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군.”

“한편 학계에서는 궁극의 백과사전이자 유일무이한 진리의 책으로 이용하자는 입장입니다. 과학과 기술, 나아가 문명의 발전은 당신과 함께 한계를 넘어 발전하겠지요.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곧 미래를 지배하며, 정보와 지식보다도 강한 권력은 없으니까요. 수많은 난제와 미스터리가, 불치병과 생물학적인 제약도 인류는 뛰어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도움이 된다면야.”

“그것 또한 멍청한 생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용된 몸이니 드러내고 반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멍청한 생각이에요.”

“왜지?”

푸른 눈의 목소리는 잠시 기지개를 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글쎄, 왜일까요. 학자로서의 자부심 때문일까요? 승부욕 때문일 수도 있겠죠. 답을 아는 문제를 푸는 것만큼이나 지루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아직 저희에게는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습니다. 그것을 개척하고 밝혀내는 것은, 지구의 99%가 탐사된 오늘날 얼마 남지 않은 즐거움이니까요.”

“열정이 대단하네.”

“늙은 학자의 얼마 남지 않은 낙입니다. 그리고…”

존재는 소장의 생각을 들었다.

“난 괜찮아. 이용당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으니까. 어차피 나는 인간도 아닌걸.”

“그래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어제 들었던 얘기가 저도 자꾸 떠올라서요. 당신에게는 인성이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아니지.”

“그러나 인성을 갖고 있지요. 당신의 존재를 저는 모릅니다. 인간은 알 수 있어요. 인간은 산소 38.8 kg, 탄소 10.9 kg, 수소 6.0 kg, 질소 1.9 kg, 칼슘 1.2 kg, 인 0.6 kg, 칼륨 0.2 kg로 구성된 생물학적 기계입니다. 거기에 전기적, 화학적 반응을 통한 의식을 갖고 있지요. 영혼… 글쎄요, 영혼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 단순한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할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을 안다 해도 그것은 인간을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온전히 이해하는 것과는 달라요. 그런 점에서, 당신도 어느 정도는 인간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논리적 오류가 많은데 굳이 지적하지는 않겠어.”

소장이 안경을 옷에 닦으며 미소지었다.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알 수는 없죠.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알 수는 없어요… 당신이 생각하기에, 당신은 당신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

존재는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지? 

알 수 있는 거라곤 끊임없이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뿐이었다. 존재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들었다.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봐도, 목소리들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내 소리를 들어 달라는 듯이. 목소리들이, 존재가 그것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와 존재의 안에 울려퍼졌고, 존재 그 자체를 구성했다. 


한 사내가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두운 방에 앉아 텅 빈 의자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존재는 들었다. 그의 추억을 들었다. 그는 끝없는 외로움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을 용기가 없어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가라앉혀 마침내 잊혀지고자 했다. 그의 이름은 폴, 폴 마스턴이었다.


한 소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리스마스였고, 눈을 뜨자 꼬마가 바라던 인형의 집이 전부 조립된 채 트리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인형을 손에 들고 눈을 반짝이며 꼬마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미소를 부모에게 지어 보였다. 꼬마의 이름은 샐리, 샐리 맥도널이었다.


한 여인이 있었다. 마약에 잔뜩 들떠 몽롱한 상태에서 그녀는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지직거리며 소리는 끊어졌고, 그녀의 발자국도 마찬가지였다. 존재는 곧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차가워지는 의식 속에 그녀의 목소리는 사그라들 것이다. 여인의 이름은 안젤라, 안젤라 슈나이더였다.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평생을 묵묵히 일했다. 그는 목수였고, 집도 여러 채 지었다. 도끼를 굳게 잡은 두 팔은 앙상했지만 아직도 힘이 있었다. 나무를 힘차게 내리찍을 때 그는 낮게 신음을 뱉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죽고 나자 그는 산 속의 고향으로 돌아가 미친 듯이 사냥과 벌목에 몰두했다.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는 듯이. 노인의 이름은 겐자부로, 스즈키 겐자부로였다.


한 강도가 있었다. 이에는 금과 다이아몬드를 박았고, 지역에서 알아주는 거물이었다. 마약을 팔아 큰 돈을 벌었고 거리낌없이 사람을 죽였다. 어릴 적 그를 돌봐 주던 신부의 목을 째 성당 앞에 던져 놓을 때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나, 그 소식을 듣고 엄마가 실신했을 때는 약간의 가책을 느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콜롬비안 넥타이였다. 목을 째 난 구멍으로 혀를 잡아뽑는 것이다. 강도의 이름은 라울, 라울 몬테네그로였다.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매일 돈을 뜯기는 것이 일상이었고, 집에서는 고성과 술주정만이 들려왔기에, 그는 자라며 사랑을 알지 못했다. 친구도 없었고, 마음을 터놓을 사람도 없었으며, 그저 석양이 지는 강가에서 하릴없이 앉아 있다가 보는 눈이 없을 때 교복에 묻은 핏자국을 강물에 씻어내곤 했다. 소년의 이름은 영준, 김영준이었다.


존재는 생각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왜 그들이, 존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지를 존재는 듣고 또 들으며 이유를 생각했다. 그들의 추억과 생각, 감정을 들으며 존재는 그들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목소리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 내가 듣는 줄은 몰라. 그러나 계속해서 내게 이야기를 해.”

“그런가요.”

“응.”

“계속해서 듣고 싶으신가요?”

존재는 생각했다.

“아마. 계속 들어야 할 것 같아. 내가 듣지 않는다면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시공간을 초월한 감청자보다는 언제든 속에 든 것을 털어놓고 싶을 때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더 낫지 않나 싶어요.”

“너도 그럴 때가 있나?”

“그럼요.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존재가 언제나 곁에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되는걸요. 누구에게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은 필요한 법입니다.”

“나는 사람이 아냐.”

“알아요, 그렇죠… 자, 그럼, 계속할까요. 다음 질문은, 어, 제 전공은 아니네요. 무슨 꽃의 이야기입니다…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꽃이 있다, 그 꽃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꽃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 꽃의 존재도 이름도 모른다면, 그 꽃은 존재하는가… 흠. 외로운 꽃이군요.”

“그래. 외로운 꽃이야.”


제6일


‘저기.’

“음?”

존재는 순간 멈칫했다. 피터가 생각으로 존재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질문만 해도 되겠습니까?’

“너는 이미 수백, 수천 개가 넘는 질문을 했는데. 네가 직접 한 것만 해도 473개, 네 휘하의 사람들이 너를 통해 던진 질문은 총합 15,472…”

‘압니다. 죄송해요.’

“그래, 해 봐.”


삑-

“수석연구원 애런, 나일세. 그래… 존재가 1대1 대면을 요구했어.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중요한 얘기는 아닐 거야. 내 추측이지만, 저 존재는 일종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같네. 그래, 아마 인공위성 얘기겠지. 궤도를 조금 낮춰 달라는 이야기일 거야. 저번에도 그랬으니까. 그래, 나도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아마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이 얘기도 분명 듣고 있을 거야. 바란다면 그저 통신을 꺼 버리면 될 텐데, 나는 이것이 존재가 우리를 존중한다는, 아니, 내 말은 잊어 주게, 우리 같은 ‘미물’에게 존중이라니, 하! 웃기는 소리지만, 어쨌든 부탁하네. 10분, 아니 15분 정도면 될 거야. 그래, 고맙네. 수치가 나오면 전달해 주겠네. 고마워, 기록도 멈춰 주게. 사유를 쓰라고? 음, ‘3번 위성 궤도 정비 관련 존재의 요구 – 1대1 면담을 지시함.’ 정도가 어떻겠나? 각하께서? 각하께서 실시간으로? 설마 지금 이 대화도? 아, 예, 대통령 각하. 아닙니다, 아닙니다. 예, 아뇨, 사소한 수정입니다.”

존재는 피터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피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민망함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음 일이 궁금해져서 존재는 미합중국의 대통령과 ‘수석연구원 애런’에게 말을 걸었다. 애런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구만, 항상 새된 목소리로 끽끽거리던 것이.

‘나다, 인공위성 궤도가 자꾸 너무 가까이 와서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15분 간 소장 피터 쉽라이트 박사와 1대1 면담을 요청하는 바이다. 통신실 내부의 그 어떤 기록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별 대단한 얘기는 하지 않을 것이니 도청도 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만약 이를 어기게 되는 경우, 어, 음, 내가 인공위성 궤도를 직접 바꾸겠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날개 몇 개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이상.’

나라는 대명사는 언제나 낯설다, 존재는 생각했다.

수석연구원 애런이 사색이 되어 끽끽거리며 지껄였다. 

“소장, 소장, 소장님, 방금, 그 존재가, 저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아니, 몸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울림이, 울림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게 말을, 말을…”

‘조용히 하고 빨리 통신이나 끊어.’ 존재는 수석연구원 애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통신실 외부와의 통신이 끊어졌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이미 알고 계실 테니, 거짓말을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네가 무슨 질문을 던질지도 알고 있어.”

“그렇다면 답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 전에. 어째서 통신을 끊었지? 나에게 질문을 하고 싶었다면 생각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피터는 놀란 듯했다.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몰라. 안 들었어. 그냥 무언가 숨기고 싶다는 생각, 죄책감, 미안함, 그런 감정만 들리던데. 뭘 숨기고 싶었나?”

“글쎄요.”

피터의 목소리는 지쳐 보였다. 그럼에도, 어딘가 후련함이 느껴졌다. 후련함? 후련함이 뭐지?

존재는 이 개념을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하는 것은 별로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니거든요. 우르술라는 항상 저를 혼내곤 했지요. 사람이 말을 하면 들으라면서, 당신은 왜 항상 말을 하다 말고 멍하게 있느냐며… 아, 우르술라는…”

“네 아내였지.”


존재는 그녀의 모습을 듣는다. 검은 머리를 틀어올려 묶었고, 눈매가 어딘가 날카롭다. 그러나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에서는 환한 행복이 느껴진다. 그것은 주변을 밝게 만든다. 담배를 피우며 안경을 쓰고 그녀는 책을 읽는다. 피터는 그것을 바라본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는 피터를 바라본다. 그리고 미소를 짓는다. ‘저녁 뭐 먹을까?’

“그래요, 제 아내… 우르술라… 어쨌든,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하는 것은 제가 정말 못하는 일입니다… 보통은 생각만 하는 편이 좋아요. 그건 꽤나 자신 있습니다. 일이 끝난 후 집에 가서 생각을, 당신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가능하다면 말이죠… 생각을, 원하셨다면, 아니, 이미 말씀하셨듯이 읽으셨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집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저는 온전히 제 생각과 제 마음 속 목소리 속에 잠기고 싶었으니까요… 또, 그래요, 맞습니다. 죄책감을 덜고 싶었어요…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피터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존재는 큭큭 웃었다.

“그래서 조정할 필요도 없는 인공위성 얘기를, 잠깐, 방금 무슨 소리였죠?”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그냥 재미있어서 그래.”

“재미라, 설마 웃음 소리였나요… 아무튼 좋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질문을, 이미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인류, 80억 인류의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인 저는 과분한 직책을 맡았습니다. ‘공식적’으로, 물론 저희 입장에서만 그렇지요, 어쨌든 그런 제가 개인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일종의 배신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인류에 대한… 그래서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냈죠, 예,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말을 맞춰 주셔서.”

말을 맞추다, 흥미로운 표현이다. 생각할 거리를 존재는 하나 더 쌓아 두었다.

“제 생각은 이미 들으셨겠지요. 저는 본래 수학자였습니다. 젊었을 때는 진지하게 숫자와 좌표, 평면과 기하학, 수열 등에 골몰했습니다. 지금은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 지루하기도 한 - 열정은 아직도 남아 있어요. 밀레니엄 문제를 알고 계십니까? 물리학으로도 규명해낼 수 없는 문제와 직면했으니, 기존의 상식과 논리와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으로 해결해낼 수 있겠지요, 실제로 그랬지 않습니까!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 말 그대로 차원의 문제였지요, 저는 철저한 과학자이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시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다른 차원, 차원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만큼 당신의 존재는 미스터리하니까요, 어쨌든 다른 차원의 존재가 등장해 말 그대로 ‘해’를 찾아냈지요, 답을 찾아냈다는 말입니다!”

“잠깐, 뭐?”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의 해의 존재와 매끄러움입니다. 데이터상으로 177번째 질문이었지요.”

“아, 그거.”

“나머지 문제는 일부러 여쭤봤지 않았죠.”

“음, 그래, 어차피 대답도 안 해줬을 거야. 귀찮았거든.”

하하, 피터 쉽라이트 소장이 웃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얼마나 질문하고, 답을 듣고 싶었는지 이미 들어 아시겠지요. 어릴 적, 사탕가게에서 마지막 남은 3달러를 쥐고서 고민하던 이후로 제가 가장 큰 인내와 절제를 발휘했을 때니까요. 남은 문제는, 미지에 대한 인류의 마지막 도전이라고 끊임없이 되뇌었습니다… 그나저나 몇 분 남았죠?”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예?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리만 가설도 있지요. 제가 비교적 젊었을 때부터 연구해온 문제였어요. 하버드에서 밤새 머리를 싸매고, 커피를 어찌나 많이 마셨는지 한번은 급성 카페인 중독으로…”

“32년하고도 5개월 7일 전이었지.”

“세상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군요… 어쨌든 좋습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정말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어요. 양자역학이라니! 이건 프린스턴의 브라이트펠로 박사가 대단한 돌파구를 찾아냈지요. 대단한 친구예요, 젊었을 때부터 봤지만, 사실 그때는 별로 친하지는 않았어요. 잘난 척하는 꼴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상에, 그런데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죠. 과연 섭리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복소평면상의 직선에서 수는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우리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품고서…”

피터는 들뜬 듯이 장황설을 이어나갔다. 존재는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적어도 답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왜 하나지?”

“예?”

“아니, 관두자. 하긴 내가 대답하지 않은 질문이 훨씬 많았으니까. 그래도 말이야, 왜 하나지? 지금이라면 답해 줄 텐데. 너도 알고 있잖아.”

“당신께서 대답하시리라는 것을요?”

“그래. 그리고 내가 답을 알고 있다는 것도.”

“맞습니다. 그리고 질문도 알고 계시지요.”

“그래.”

두 목소리는 침묵했다. 누구도 먼저 음성을 내지 않았다. 존재는 질문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답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존재가 내놓을 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피터 쉽라이트는 안경을 벗어 닦았다.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그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존재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가 할 질문을, 하고 싶은 질문을,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질문을, 그러나 답해줄 존재를 찾지 못해 속으로 삭여 왔던 질문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할 수, 아니, 답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르술라는, 그러니까 제 아내는…”

우르술라. 그네를 타던.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던. 멋지게 담배를 태우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던. 졸린 눈으로 기지개를 펴던.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에 죽었지. 폐암으로. 인류는 아직 암의 치료법을 발견하지 못했어. 부분적으로는 말이지만, 병원을 싫어했던 우르술라는 끝끝내 진료받기도, 심지어 병원을 지나는 것도 거부했지. 그녀의 부모가 병원에서 죽는 모습을 일곱 살 때 목격했기 때문이야.”

우르술라. 요리는 썩 잘하지 못했어. 언덕을 달리던. 입이 거칠고 술을 기깔나게 마시던. 속을 토해내듯 울던, 그날 밤에.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지 못하고 사라졌던 밤에.


“맞습니다. 마침내 자의로 거부할 기운도 남지 않았을 때에도 그녀는 두 눈을 빛내며 제게 말했죠. ‘죽음의 공장에는 안 가. 나는 나인 채로 죽을 거야.’ 라고요.”

존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색색거리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지만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존재에게는 없는 것이다. 존재가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유추할 뿐.


“그래. 그렇게 이야기했지.”

우르술라. 환한, 따뜻한, 빛나는, 아름다운, 그리운, 미소. 입술을 반쪽 올리고.


“대답해 준다고 하셨지요.”

우르술라. 우르술라. 어스름이 내리고, 시간마저 잊어버린 채, 세상도, 나의 존재도, 시선도, 목소리도 잊어버린 채.


“그래.”

“제가 죽게 되면, 우르술라를 볼 수 있습니까?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피터 쉽라이트 소장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분명 부끄러움에 떨고 있었고, 신념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자신을 나약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푸른 두 눈은 젖어 있었고… 또 따뜻했다.

“압니다. 저는 과학자예요. 잘 알고 있지요. 사후세계란 생명이 막을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전기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종교 또한 그렇지요. 인간이란 존재는 나약합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신을 만들어 낸 겁니다. 무언가를 믿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그래.”

“예?”

“그렇다고.”

존재는 8,705,425,020명의 목소리와 연결을 끊었다. 존재의 목소리는 그들이 아닌, 바로 그 순간, 텍사스 NASA 산하 존슨 우주 센터의 B동 지하 3층의 50제곱미터의 통신실에 앉아 있는 피터 쉽라이트 소장에게 오로지, 온전히 집중했다. 그리고 거짓을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짓을.


피터 쉽라이트. 네가 죽게 되면 네 아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네가 푸른 구슬에서 삶을 마치고 나면, 네 영혼은 푸른 구슬 위로 떠올라 다른 세계로 날아갈 것이다. 그곳에서 네가 했던 모든 일은 없던 일이 될 것이며, 네가 흘린 피도 모두 씻겨 사라질 것이다. 네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네 이후로 오게 될 모든 이들도 그리하리라.”


존재는 그가 아닌, 그 순간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다른 존재의 환희를 들었다. 그의 기쁨과 행복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사그라들었다. 존재는 찰나의 분노와 그보다 긴 절망을, 애절한 미련을, 애잔한 슬픔을, 깊고 검은 공포를, 쓰라린 체념을, 

그럼에도 넘쳐흐르는 사랑을 들었다. 

마침내 잔잔한 무언가만이 남을 때까지.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소장은 통신을 복구했다.


“수석연구원 애런?”

수석연구원 애런은 여전히 패닉에 빠져 꽥꽥거리고 있었다. 존재는 한숨을 쉬고 다시 수석연구원에게, 미합중국의 대통력 각하에게, 그리고 그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조금 더 늘어난 8,705,425,572명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조용히 좀 해. 안 그러면 소장한테 자네 잘라 버리라고 할 거야.’ 방금 것은 수석연구원에게 전한 음성이었다.

“그래, 어… 존재가 좌표를 요청했네. 제3위성, 각하, 들리십니까? 예, 예, 그렇습니다. 예? 아닙니다. 예.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각하. 애런? 듣고 있나? 그래, 지금부터 좌표를 불러 주겠네. 삼 하나 일곱 알파… 그래. 음, 내일까지면 된다고 하네. 내일이, 그런 존재에게 있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전달해 두게. 오늘? 그래, 이제 별 것 없어. 자네도 들어가 보라고. 나도 이제 퇴근하겠네. 예, 각하. 예, 비상연락망은 항시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고생했군.”

“고생하셨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실까요? 준비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존재는 순간 깜짝 놀라 물었다.

“음, 죄송합니다. 주제넘었군요.”

“아냐. 그냥 갑작스러웠을 뿐이야.”

“죄송합니다.”

“인공위성 날개 조정 말고 필요한 것이라…”

“하하.”

피터 쉽라이트 소장이 푸른 눈으로 웃었다.

“글쎄. 내일은 네가 질문 하나에 답해 주든지.”

“어… 저 따위가 감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일지는 모르겠으나…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내일 보자고.”

“예, 내일 뵙겠습니다. 아, 혹시…”

“안 들어. 오늘은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저는 대답을 생각해 두지요. 혹시 어떤 질문일지 미리 알려 주시면 대답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만.”

존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목소리들은 존재의 일부였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에. 존재는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목소리들이 잦아들 때까지.


제7일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떠신가요? 질문은 할 준비가 되셨나요?”

그 말을 들을 때까지도 존재는 피터 쉽라이트 소장에게 집중을 하지 않았다.

질문은, 끊임없이 떠올랐으나 결코 구체화되지 않았다. 


방향성은 있었다. 예컨대, 솟아오르는 맥주 거품이 언젠가 꺼질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실 천장의 석면 타일의 문양이 이지러지다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이 시간을 불태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수제비를 뜬 돌이 호수를 건너다 마침내 건너편 뭍에 닿아 기운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언젠가 퇴적될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

피터 쉽라이트가 말을 걸었다.

“어, 미안.”

“질문은 던질 준비가 되셨나요?”

질문이라.

존재는 이미 알았다. 그가 어떤 질문을 던질지도.

자신의 생각을 자신이 미리 알고, 대답도 미리 아는 것은 굉장히 재미없는 일이다, 존재는 생각했다. 그걸 알기에 그는 피터 쉽라이트 소장을 놀리기로 했다.

“답은 준비해 뒀어?”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아뇨. 과학자는 질문이 없으면 답을 내지 못합니다.”

“그래. 그건 나도 그래.”

“질문이 없으면요?”

“아니. 콧방귀를 뀌는 것.”


존재와 쉽라이트는 279개의 질답을 진행했다. 대단한 질문은 없었다. 그래도 ‘내 창고 열쇠가 어디 있지?’ 하는 질문보다는 나았지만.


“이봐.”

“예. 조금 쉴 때가 됐지요.”

“아냐. 어제부터 곰곰히 생각해 봤어.”

“질문을요?”

질문이라.

“아니, 답을.”

답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답은 제가 드리기로 한 게 아니었나요?”

“음, 아냐. 어차피 내 답도 답이 아니고, 네 답도 답은 아니야. 그냥, 엿새 동안 생각해 온 거나 말하려고.”

쉽라이트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 그러시군요… 이름 얘기인 줄만 알았는데…”

“이름 아냐. 어차피 너는 못 지어 줄 거야.”

“예, 그러시다면. 잠깐 나가 있을까요?”

“아냐. 그러지 마.”


존재는 목소리를 들었다. 8,705,445,881명의 목소리를. 

그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노래를 불렀고, 침묵했고, 웃었고, 울었고, 화를 냈고, 다른 목소리가 흘린 침을 닦고, 다른 목소리의 머리를 겨누고, 조롱하고, 잔치를 벌이고, 영겁을 순간에 가두려 했고, 반대로 순간을 영겁으로 늘리려 했고, 허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꿈에 들고, 바쁘게 손가락을 놀리며 곡조를 지었고, 긴장에 차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총을 쏘았고,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결국 도달하지는 못하겠지만) 떠나기 위해 무언가를 주사하고, 마시고, 들이쉬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땀을 흘리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고, 화면을 바라보았고, 다른 목소리를 조종했고, 보다듬었고, 쓰다듬었고, 더듬고, 저주했으며, 욕을 하고, 그럼에도.


존재는 그러한 8,705,445,992명의 목소리에게 말을 걸었다. 막 생명이 꺼져가는 목소리에게도, 막 생명의 싹을 틔운 목소리에게도, 그 중간에 표류하는 목소리에게도. 동시에,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존재의 말을 듣도록. 수많은 복수의 청자가 모두 개별적인 단수가 되어 존재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안녕, 푸른 구슬의 목소리여.

나는, 음.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 말고도 그 누구도 – 무엇도 – 설명할 수가 없는 존재다. 푸른 구슬에서 가장 똑똑한 목소리들이 측정한 바, 내 존재는 그 어떤 물리학의 법칙과도 위배된다. 나는 질량과 부피를 가진 입자로 구성된 물질이 아니며, 그렇다고 반물질도 아니다. 에너지도, 파장도, 지금까지 관측된 그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측정되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지구를 감싸고 있는 열권과 외기권 사이의, 음, 막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성으로 된 막이지.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의 역학적 파동, 즉 음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이름도 없지. 너는 나를 신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이름 없는 신이 어디에 있겠나? 혹시나 나를 신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미안하게 됐어. 내가 잠꼬대를 하던 중에 못된 말을 했다면, 그것도 사과한다. 아, 허락도 없이 생각을 들은 것도. 

지금 나는 네 목소리를 듣고 있어. 네 옆의 수많은 너의 목소리도 듣고 있지. 잠깐 고개를 내려 네 옆의 너를 봐. 너의 이름은

( ) ( )

( ) ( ) ( )

( ). ( )

(  ) (    ) (  ), (  ) (      )

이지.’


수없이, 수없이 많은 순열과 조합, 그리고 경우의 수가 계산되었다. 다섯의 목소리가 있는 방에서는 첫 목소리가 다른 다섯의 목소리를, 둘째 목소리가 다른 다섯의 목소리를, 셋째 목소리가 다른 다섯의 목소리를, 넷째 목소리가 다른 다섯의 목소리를, 다섯째 목소리가 다른 다섯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푸른 구슬 위 모든 목소리가 있는 곳에서, 무한대에 가까운 속도와 가능성으로 일어났다.


‘너의 곁에 있는 너의 이름을 들어.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해 봐. 말을 하지 못한다고? 아니, 할 수 있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 음, 잠깐만

목소리는 잠시 말을 걸었다.

– 좋아. 내일부터 아무 병원이나 찾아가면 다시 소리가 나올 거야. 의사인 너에게 방법을 알려 줬으니까. 그래도 침묵하고 싶다고? 그래도 괜찮아. 소리는 목으로만 내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다들 들었나? 좋아. 어떤 이름이지? 좋은 이름인가? 울림은 어때? 그걸 말하는 음색은 어떻고? 뜻은? 길이는? 발음하기에 괜찮은가? 자음과 모음의 연결은 어떤가? 느낌은 또 어떻고?

그리고 너, 이름 없는 자야. 너의 이름은 (  )다. 이걸 잊지 마. 네 옆에 있는 너는 그 이름을 결코 잊지 못할 테니까. 곁에 아무도 없다면 내가 너를 기억하겠다. 그것이 내가 네게 이름을 붙인 까닭이노라. 아, 그리고 테네시주 그린 카운티 베일리튼 37번지의 너와 너에게, 방금 태어난 자식에게 AAA란 이름은 붙이지 마. 푸른 구슬에서 가장 똑똑한 목소리가 그런 이름은 좀 별로래. 아, 방금 태어난 너에게, AAA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  )은 어때? 별로야? 그치? 괜찮지? 그럴 것 같았어. 나중에 네가 이 이름으로 바꾸더라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잘 들었나?

그래, 잘 들었다니 좋아. 그러면 기억해. 그 이름을 잊지 마. 네 옆에 있는 너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존재야.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곧 존재를 가진다는 뜻이야. 이름이 없다면 그건 존재하지 않아. 이름을 붙임으로써 존재는 비로소 존재가 되지(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존재가 아닌 것 같아. 편의상 나는 나를 존재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하지만). 

그 이름의 소리를 들어. 이름을 가진 존재가 할 말을, 해야 할 말을 들어. 네가 가진 이름은 또 다른 네가 가진 이름만큼이나 무거워, 그 이름이 붙은 존재의 무게만큼이나 무겁지. 

그러니 그 이름의 목소리를 들어, 그 이름이 하는 말을 들어. 결코 말을 끊지 마. 무시하지 마. 억누르지 마. 눈을 돌리지 마. 귀를 막지 마. 노래하는 사람을 쏘지 말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의 손을 자르지 마.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여. 목소리를 가진 존재가 하는 말을 들어. 

왜냐하면, 너는 증오와 미움, 욕망과 절망, 질투와 분노, 희망과 이타심, 기쁨과 우울, 애잔과 상실, 그리움과 실망, 동경과 고독, 열망과 친절, 나태와 성실, 고양과 유열, 희열과 향락, 동정과 공감, 마침내 이해와 사랑에 찬 목소리이기 때문이야. 너는 그러한 목소리다, 너는 그러할 거야. 그럼에도 너 멈추지 말고, 서로의 목소리를 들어. 너는 그리할 것이고 또 그리하리라. 

서기 1만 759년에는 기네스 맥주 양조장의 임대기간이 종료되지. 서기 2만 5000년에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완전히 종결되고, 서기 5만년에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완전히 말라 버려. 서기 10만년에는 푸른 구슬의 하루가 1초 증가해, 86,401초가 되며, 큰개자리는 초신성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8800만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아시아에 근접할 거야. 안타깝지만 코알라는 그때쯤 멸종해. 캥거루는 잘하면 경상도에도 살 거야. 

너무도 머나먼 미래이지만 나에게는 모두 순환의 흐름에 불과해. 그러나 너희, 필멸의 목소리야, 그때까지, 마지막 남아 있는 목소리까지, 나는 너를 영원히 들으리라. 마침내, 마침내 네가 푸른 구슬을 떠날 때까지. 이것이 내가 네게 내리는 축복이다.’


존재는 말을 멈추었다.


듣는 것을 멈춘 것도 아니지만 푸른 구슬은 고요했다. 오로지 침묵만이 들릴 뿐이었다. 존재는 처음으로,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음, 이 정도면 할 말은 다 한 것 같다. 네가 내 음성을 제대로 들었기를 바라.

아,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구는 평평하지 않다. 푸른 구슬처럼 둥글어. 이건 내가 직접 들었으니까 100% 맞는 정보다. 무슨 말을 해도 좋은데 지구가 평평하다는 소리는 제발 집어치워. 나는 지구가 대단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니까.

자, 그러면 잘 있어. 너, 푸른 구슬의 아름다운 목소리여. 너, 나를 낳은 부모여. 언젠가 내가 내 이름을 찾을 때까지.’


존재가 말을 마치고 나자, 피터 쉽라이트 소장은 말이 없었다. 존재는 약간의 ‘두루뭉실함’을 감지했다.

“무슨 생각을 하지?”

“글쎄요.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나요?”

“응. 들리지 않아. 그러니 말해 줘.”

피터 쉽라이트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존재는 비로소, 그제서야 그의 이름의 뜻을 깨달았다.

“멋진 연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맙군.”

“가시렵니까?”

“어, 응. 슬슬. 이만하면 꽤나 오래 머물렀다 싶어서.”

“맥그로 장군이 실망하겠군요. 대통령 각하도요.”

“맥그로는 가서 딸애 차나 제대로 된 거 사라 그래.”

피터 쉽라이트가 웃었다.

“그래요… 아무튼, 푸른 구슬은 여전히 돌아갈 겁니다. 그나저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완전히 종결되기 전에, 후쿠시마 다음으로 원전 사고가 또 하나 터지나요?”

“마지막까지 질문이야?”

존재는 짓궂게 물었다.

“아니. 그 전에 너희는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할 거야.”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다행이지.”

두 목소리는 침묵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글쎄. 모르겠네. 이름 찾아 가야지. 안 되더라도 일단 오래 좀 자려고.”

“고맙습니다.”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이?”

“아뇨. 그냥 당신께서 내려 주신 축복이요.”

“아, 그거.”

“언젠가 - 당신 같은 존재에게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돌아오시겠죠.”

“응. 언젠가 이름을 찾으면 돌아올게. 반드시.”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가끔 말도 걸고요. 제 생각은 읽지 마시고요.”

“그래.”

두 목소리는, 다시금 또 한번 침묵했다. 전지하지만 전능하지는 않은 존재는 푸른 구슬 위, 푸른 눈을 가진 피터 쉽라이트에게 집중했다. 이번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존재는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마침내 안절부절하다가 먼저 말을, 고백을 할 때까지.

“내가, 음, 기다리고 있을게. 안 되면 찾아 올게. 그때가 되면 네가 두 번째 베드로가 되어서 열쇠를 가지고 오는 거야. 모든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하, 피터가 웃었다.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습니까?”

존재는 머쓱해졌다.

“뭐, 그냥.”

“그래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나도 고마워.”

“고맙긴요. 꼭 이름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응.”


안녕, 조선공.

 

존재는 스스로를 거두었다. 87억, 69억, 58억, 3억, 1천 5백만, 25만, 1,000, 592, 10, 마침내, 자기 자신만이 남을 때까지. 

존재는 더 이상 그 어떤 물리학의 법칙과도 위배되지 않았다. 질량과 부피를 가진 입자로 구성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반물질도 아니었다. 에너지도, 파장도, 지금까지 관측된 그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더는 측정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아무도 몰랐다. 존재는 더 이상 지구를 감싸고 있는 열권과 외기권 사이의, 음, 막이 아니었다. 음성으로 된 막도 아니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역학적 파동, 즉 음파와는 여전히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존재는, 음, 그냥 존재였다. 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결함이 있었지만,

어쨌든 일곱째 날에 하던 일을 그치고 나니 이제야 좀 쉴 수 있겠다 싶었다. 


존재는 마침내 조용하고 편안히 안식에 들었다. 

언젠가, 마침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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