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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Dec 30. 2020

뉴욕의 깡패들

갱스 오브 뉴욕을 보고

마틴 스콜세지(외래어표기법 공식 표기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갱스 오브 뉴욕>을 보았다. 뉴욕의 깡패들이 주된 등장인물로 등장하며(놀랍게도 한국어 깡패의 어원은 Gang이다. 진짜로.) 시대적 배경은 뉴욕 징집 거부 폭동이 일어났던 1860년대다. 그러니까 어새신 크리드 3(미국 독립전쟁)와 레드 데드 리뎀션 2(1899년) 사이의 이야기. 칙칙하고 누렇게 뜬 하늘 아래, 서로 두들겨 패고 칼로 찌르고 죽이고 물어뜯고 살아남으려 하는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상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의 이면에서는 온갖 범죄가 드글거리며 공권력은 관심도 없고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한 놈이 죽었다고? 괜찮다. 하루에만 만 명 가깝게 배를 타고 쏟아진다. 빨간 머리에 녹색 눈, 괴상한 악센트를 가진 아일랜드 놈들이.


영화는 아일랜드계 갱단 데드 래빗과 토박이들로 이루어진 '토착민들'(맞나?)의 결투로 시작된다. 두 범죄자 집단이 대단히 비장한 분위기로 서로 맞부딪친다. 결투는 어새신 크리드의 전투를 연상케 한다. 전체적으로 과장되고 희극적인 분위기. 슬로 모션, 클로즈업, 휙휙 날아가는 몸뚱아리, 절제된 유혈 표현, 괴성을 지르며 귀를 물어뜯는 액션. 그렇다. 분위기는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도살자 빌이 쓴 모자도 우스꽝스럽다. 총은 나오지도 않고, 신나는 기타 솔로가 나오고, 칼과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든다. 결투가 끝나고 리암 니슨이 사망하게 되고, 도살자 빌은 희극적이고 과장된 태도로 조의를 표한다. 


이후 영화는 살아남은 신부의 자식, 교도소인지 소년원인지에서 갓 출소한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무협지 느낌도 나고(아버지의 원수를 정체를 숨기고 힘을 길러 마침내 문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척살한다), 아버지의 원수 아래에서 부정을 느끼며 번민하는 모습은 햄릿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극, 민족극 요소도 있고. 여기에 당대 미국의 역사적 배경과 생활상이 밀도 있고 칙칙하게 펼쳐진다. 욕설, 폭력, 범죄, 성애 묘사. 억세디억센 아일랜드 사투리('아임 포인')와 함께 핍박받던 아일랜드인의 삶과 투쟁이 역사적 맥락(아일랜드-영국 관계)에 실려 펼쳐지기도 하고(진짜 '토착민'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동상으로 딱 한 컷 등장한다. 그냥 다 꺼졌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는 마침내 개인적인 복수와 징집 거부 폭동이라는 국가적 사건이 얽혀 폭발한다.


전체적으로 재미있게 본 영화였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연기. 도살자 빌 역할을 맡았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보는 내 숨통을 콱콱 조여왔다. 시니컬하면서도 분노에 차 돌면하는 모습도, 능글맞고 여유로운 모습도, 가차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도 배우가 아닌 실존 인물을 찍은 다큐멘터리 같았다. 젊은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또 어떻고. 초반부에서 그를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하려는 친구에게 '표준' 억양으로 말하다, 그의 정체를 알아채고부터는 아일랜드 억양으로 바뀐다. 맥글로인과 신경전을 벌이다 동시에 조끼를 벗고 달려드는 장면도 긴장감이 최고였다. 가장 좋았던 캐릭터는 몽둥이를 든 배불뚝이 수도승. 풍채도 당당한데다가 말도 잘 하지, 민족의식도 뚜렷해 제3의 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1은 리암 니슨, 2는 도살자 빌.)


나는 조폭 미화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이 좋아 의리고 남자의 주먹이지 실상 까뒤집고 보면 떼지어 약한 사람들 괴롭히는 범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 봤자 깡패는 깡패다. 초딩 때 야인시대는 재밌게 보긴 했지만, 그래도 악은 악이니까 악이라 한다. 


중국 고사에는 이런 얘기가 자주 나온다. '모년 모처 모씨가 모 군주를 죽이려 하였다. 주위의 저지로 암살 시도는 무위에 돌아가고 모 군주 앞에 자객이 포박되어 끌려 오자 군주가 묻기를, '어찌하여 네놈은 나를 죽이려 하였느냐?' 하여 자객이 답하니 '나는 누구에게 은혜를 입은 몸이다.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으니, 네놈을 죽이지 못한 것이 그저 안따까울 따름이다.' 이에 군주가 탄복하여 '네 충성이 갸륵하니 천지가 감명하리라. 큰 뜻과 기개를 나를 위해 펼치지 않겠는가' 하고 묻자 자객은 '어찌 한 몸으로 두 주인을 섬기리오' 하고 답하니 군주가 아쉬워하며 자객을 참한다. 


뭐 이런 얘기. 충성이니, 명예니, 의리니, 호방함이니, 원수니 복수니 하는 가치들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황당무계하고 '저렇게까지 해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릴 적에 삼국지나 십팔사략, 맹꽁이 서당을 보면서 저런 일화에 감탄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 갱스 오브 뉴욕은 굉장히 옛날 느낌이 난다. 범죄자들인 건 맞지만 내심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 낭만! 그 의리! 그 충심! 싸나이! 민족의식! 한! 적이지만 훌륭하다! 관객은 몰입해서 극을 따라가게 된다. 겪어보지 않았지만 시대의 고뇌와 개인적인 고뇌, 낭만이 넘치는 승부, 정치극, 추악한 탐관오리, 배신 등 드라마틱한 요소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말은 굉장히 충격적이다. 앞서 말한 요소로 점철되어 긴장은 최고조에 오르고, 마침내 두 갱단이 비장하고 처절하게 신성한 전투를 벌이려는 순간('고대'의 신성한 결투법을 운운하며), '응~ 그딴 거 없어~' 하고 갑자기 포탄이 떨어진다. 무감각하고, 무자비하고, 무신경한 태도로. 무슨 자연재해 같이. 어딘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생각도 들더라. '아니, 잘 놀고 있는데 니가 뭔데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야' 묻지만 포탄과 싸이코 살인마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애들이 애들 나름대로 룰을 정해놓고 모래밭에서 싸우고 있다. 아니, 놀고 있다. 이유는 대단할 것도 없다. 그냥 믿음의 방식이 다르고 문방구 오락기에서 누가 게임하느냐 그것 때문이다. 나뭇가지는 총이고 솔방울은 수류탄이라면서. 자기들 딴에는 되게 진지하고 비장하다. 근데 갑자기 어른 하나가 와서는 모래밭에 그려둔 그림을 발로 죄다 지워버리고 헛짓거리 말고 학원이나 가라면서 귀싸대기를 후려치는 것이다. 애들은 당연히 벙찌겠지. 포탄이 떨어진 파이브 포인츠에서 연기 속에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얼이 빠져 버린 디카프리오의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표정을 어디서 봤냐면 영화 시작할 때 어린아이였던 암스테르담의 얼굴에서 봤다. 어른들이 근엄하고 기계적으로 등장하자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놀이는 끝났구나. 쓰라린 귀싸대기를 부여잡고 꼬마는 뭔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것이다. 사회의 일부로, 세상에는 규칙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채로. 빌은 결국 어른이 되지 못했다. 끝내 낭만, 명예, 체면 같은 고루하고 유치한 가치들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는 '나는 진정한 미국인으로 죽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미국은 진정한 미국이 아니란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2020년 대 코로나 시대를 맞아 미국인들은 여전히 흑인을 쏴죽이고, 아시아인들을 패죽이고, 멕시코인들을 막겠다고 장벽을 세우고, 폭도로 돌변해 상점을 약탈하고 있다. 도살자 빌의 유지는 잘 이어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허무하다면 허무한 결말이고, 상징적이라면 상징적인 결말이 아니었나. 그게 좋은 것인가? 혼란과 자유의 경계는 어디인가? 인간은 선하며 질서를 추구하는 동물인가? 인간은 약자를 돌보며 배려하는 동물인가? 찾아보니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그리려 했다는 것 같다. 감독의 생각은 잘 모르겠다. 내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인간은 혼란스러우며 약자를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생물이다'라고 말하려 했던 것 같지만, 동시에 결말 부분의 폭격을 보면 그런 인간에게 일말의 연민을 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 나는 잘 모르겠다. 약하니까 체계와 질서, 안정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총평: 좀 뜬금없는 슬로우 모션이랑 카메라 워킹, 효과(특히 마지막에서 암스테르담이랑 제니가 사라지는 부분은 진짜 깬다. 화면 밖으로 걸어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스르륵 하고 천천히 사라짐)가 옛날 느낌이 났지만 재밌게 봤으니까 4.1점.


엔딩 크레딧 곡은 아일랜드 밴드 U2의 '미국을 세운 손'(The Hands That Built America). 아이러니한 제목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sj15WP_tUoo


Oh my love

It’s a long way we’ve come

From the freckled hills to the steel and glass canyons

From the stony fields, to hanging steel from the sky

From digging in our pockets, for a reason not to say goodbye

오오, 내 사랑

우리 참 먼 길을 왔구려

점점이 선 언덕에서 강철과 유리의 협곡으로

돌만이 가득한 들에서 하늘에 매달린 강철 다리로

돈도 수많이 썼지요, 이별을 고하지 않으려


These are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Russian, Sioux, Dutch, Hindu

Polish, Irish, German, Italian

이들의 손이 미국을 지었다오

러시아인, 수 족, 네덜란드인, 힌두교도

폴란드인, 아일랜드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I last saw your face in a watercolour sky

As sea birds argued a long goodbye

I took your kiss on the spray of the new line star

You gotta live with your dreams

Don’t make them so hard

수채화빛 하늘에서 당신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지

바다새들이 길게 작별을 고할 때

새롭게 늘어선 별들이 흩뿌려진 가운데 당신 입맞춤을 받았다오

꿈을 꾸며 살아요

너무 어려운 꿈은 말고


And these are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These are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The Irish, the Blacks, the Chinese, the Jews

Korean, Hispanic, Muslim, Indian

그래요, 이들의 손이 미국을 지었다오

이들의 손이 미국을 지었어요

아일랜드인, 흑인, 중국인, 유대인

한국인, 히스패닉, 무슬림, 인도인


Of all of the promises

Is this one we can keep?

Of all of the dreams

Is this one still out of reach?

수많은 약속 중에서

이것만은 지킬 수 있겠소?

수많은 꿈 중에서

이것만은 아직도 잡히지 않소?


It's early fall

There’s a cloud on the New York skyline

Innocence dragged across a yellow line

These are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These are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초가을

뉴욕 시의 스카이라인에는 구름 한 조각이 걸려 있소

노란 선을 지나 그어진 순수

이들의 손이 미국을 지었다오

이들의 손이 미국을 세웠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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