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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Jan 13. 2021

스케치-귀신

모든 귀신 얘기는 전부 똑같이 시작한다. 

'나는 귀신 따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전부는 아니다, 그래. 열에 아홉 정도는 그렇다(하나는 내가 원래 신기가 있어서 어쩌고로 시작한다). 배경은 군대, 병원, 시골마을 뭐 어디든 좋다. 등장인물도 마찬가지다. 무당, 친구, 돌아가신 할머니 등 상관없다. 결말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그렇다. 뭐가 됐든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보면 나는 무심코 코웃음을 치게 되는 것이다. 첫째, 나는 과학을 신봉하며, 둘째, 귀신 따위는 없고, 셋째, 어차피 뻥인데 뭘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느냔 말이다.


말했지만, 나는 귀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니 놈이 장롱 옆에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놈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문을 닫고 후다닥 뛰어나와 담배를 한 대 물고 나는 정신병원 번호를 검색하다 치료비가 무서워져서 담배를 비벼 끄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놈은 아직도 있었다. 


말했지만 그건 귀신이 아니었다. 아직은. 분명 너무 지쳤을 거다. 뇌가 환각을 보는 거야. 환각과 환청은 조현병 증상 중에서도 심각하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어서 나는 극도로 심각해졌다. 어제는 분명 멀쩡했는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럴거야. 분명. 


그래서 나는 맥주 피처를 하나 사 앉은자리에서 전부 비웠다. 몽롱한 가운데 나는 이불이 닿지 않게(5평짜리 작은 방이니까) 조심해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꿈에서 회사 대표가 나에게 진단서를 요구했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의사가 따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30분에 6만원짜리 청구서를 내밀었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니 놈은 아직도 거기 있어서 나는 그만 울고만 싶어졌다. 


놈이 있다고 했는데 이건 내 직업상 매우 적절한 표현을 택했다고 생각한다(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놈은 있었다.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없이  냄새도 질량도 부피도 - 심리적 부피를 제외한다면 - 없이 그냥 있었다는 뜻이다. 말을 걸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시선은 문 위쪽에 못박혀 하늘하늘(느낌상 그랬다는 거다), 자리를 차지하고만 있었다. 하필 좁아터진 방에서 옷장 문 앞에 있었기 때문에 살짝 짜증이 났다. 책상 아래 들여다보지도 않는 곳에 처박혀나 있었더라면 신경이라도 덜 쓰였을 텐데. 


어쨌든 출근을 하긴 했어야 했기 때문에 밀대로 옷장 문을 열려고 했으나 뭉툭한 끝으로 열릴 리가 없었고 나는 당연히 밀대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밀대는 쑥 하고 놈의 머리를 가로질러(혹여나 궁금할까봐 설명하자면 엉덩이는 바닥에 붙이고 팔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대가리만 들고 있다) 가슴과 무릎을 가로지른 채 동동 떠 있었다. 세상에. 지금에라도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옷걸이로 열까 했는데 당연히 옷걸이는 옷장 속에 있다. 어차피 저건 없어. 내 환각이야. 하고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팔꿈치가 얼어붙은 듯 차가워서 보니 대가리에 살짝 들어가, 이런 제기랄, 들어가 있었다. 나는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 먹은 갈비찜이 상한 것 같다고 진심으로 울먹거렸다. 다행히 팀장은 선선히 병가 신청을 받아들였다. 



작년 3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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