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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Mar 10. 2021

번역 회사에 다닌다는 일

번역이라 함은, 창작은 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재주는 부족하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열에 한 번 영감이 튀어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 창작 대신 하는 일이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문학 번역가다. 나는 아니고.

19년 10월부터 다니기 시작했으니 2년이 조금 못 되었다. 쥐꼬리만한 월급 받으면서 다니지만 어쨌든 나는 항상 번역가가 되고 싶었고 회사 분위기도 - 최근에는 조금 거지 같지만 - 괜찮아서 만족하면서 다니고 있다. 돈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먼저 장단점부터 얘기해 보자.

<좋은 점>:

여러 배경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가령 금형 사출 공법이 뭔지 알 수 있다. 쓸모는 없겠지만.

게임 소식을 미리 알 수 있다. 가끔 <CONFIDENTIAL>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찍힌 동영상이나 문서를 보다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디아블로 4 소식도 미리 알았다. 입이 근질거렸지만 잘 참았지 싶다.

한국어 실력이 반강제적으로 향상된다. <문법 나치>란 말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절로 그리 되더라. 맞춤법 틀린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고치고 앉아 있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려나.

영어 실력도 확실히 는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모르면 피드백 날아오니까. 토익 잘 본 게 도움이 되더라.

영어 말고도 독일어나 일본어, 스페인어도 배울 수 있다. 배워?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단어 몇 개를 알게 된다.

마케팅이나 법률 관련 '문법'을 알게 된다. 어차피 쓰는 표현은 죄다 거기서 거기니까. 마케팅에서 쓰는 용어가 따로 있고 법률 문서에서 쓰는 용어가 따로 있고, 또 매뉴얼에서 쓰는 문장이 따로 있다. 

문장을 자연스럽게 쓰게 된다.

<나쁜 점>:

허리, 손목, 모가지, 골반이 아작난다. 이건 사무직이라면 다 그렇겠지만.

맞춤법 틀린 것이 눈에 자꾸 밟힌다. 이걸 지적하면 쪼잔한 사람이 될까봐 말은 할 수 없다.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잊는다.

백날 번역해 봤자 - 마스크, 전자 담배, 3D 프린터, 신작 게임, 프레스기, 아이폰, 우버 -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연하지. 하청의 하청의 하청까지 갈 때도 있으니까.

미래가 어둡다. 그러니까 누가 구글에 테러 좀 해라.

취미가 일이 되니까 재미가 없다. 

번역에 하루하루 애정이 사라져만 간다.

마지막 것이 특히 중요하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번역가가 되고 싶었다. 말과 말을 소중히, 또 조심스럽게 골라 '옮긴다'는 일은 더없이 아름답다. 문화와 울림, 떨림을 온전히 이해하고, 숙어와 표현을 일대일로, 때로는 적절히 번안하여 단어를 보듬어 내 앞에 펼쳐진 은하수에 사랑스럽게 놓는 것, 그것은 진실로 매력적이며 또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어떤가. 매일매일 쫓기는 것이다. "LM님, 12시까지 납품 부탁드려요." 조졌다. "죄송합니다. 30분만 늦게 드려도 괜찮을까요ㅜㅜ"

그럼 그냥 QA 대충 돌려서 맞춤법 틀린 거랑 태그 빠진 거, 문장부호 잘못 쓴 거만 골라서 재빨리 고친다. 기계적으로 메일을 쓴다. 번역사가 개판 난장을 쳐 놔도 바쁘니까 피드백도 주지 못한다. 창의성? 용어집에 나온 것 안 따르잖아? 당장 피드백 와서 고치라고 난리다. 내가 유일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일은 게임 번역 하다가 등장인물 말투를 바꾸는 일에 한정된다. 운이 좋으면 재치를 부려서 말장난도 재량껏 번역하지, 그것이 아니라면야. 기계 매뉴얼 작업할 때면 살짝 불안하다. 내가 만약 "not"을 빼먹어서, 선량한 근로자가 돌아가는 칼날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어떡하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을 옮긴다라, 좋은 말이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가닿는 일이다. 가닿는다라. 나는 그저 묵묵히 나른다. 무엇을 나르는지도 모르고, 그냥 하루하루 할당된 일을 납품할 뿐이다.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다만.

그래도 누군가 인터넷에서 보고 "하, 초월번역이네!" 하고 웃어 줬으면 좋겠다. 내가 알 길은 없겠지만.

번역에 대한 애정을 아직 잃고 싶진 않아서 가사 번역을 열심히 한다. 한번씩 읽어 주시는 분들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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