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코뿔소 May 11. 2019

'생명은 죄인가?'에 대한 단상

1.
 
아버지의 곰팡내 나는 책에서 본 옛날이야기는 항상 똑같이 시작한다. 할 짓이 없어 심심한 신이 진흙인지 뭔지를 빚어다가 후- 하고 콧김을 불어넣는다. 그럼 사람 형상을 한 조각상은 꾸물꾸물거리면서 살아나 개미떼처럼 새끼를 친다.
 
다행히도 내가 지금 사는 세상에는 법이란 게 있어서, 자주 두들겨 맞긴 했어도 홍수나 벼락은 내려온 적이 없다. 아니, 이건 법하고는 상관이 없나? 요는, 아버지가 신이 아니라 다행이란 소리다. 사실 쪼끄만 새끼돼지들이 애초에 무슨 잘못을 했는가도 싶다. 그저 태어나서, 태어난 김에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을 뿐인데. 잘못이라면 태어난 죄밖에 없다.
 
그게 죄라면, 참 지랄맞은 죄가 아닌가 싶다. 적어도 자기가 선택한 끝에 저지른 죄라면 억울하지나 않겠는데.
 
2.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병아리의 목을 하나씩 꺾고 있을 때였다. 오후, 초등학교 앞 박스에 가득 담긴 병아리는 서로 보채며 어지러이 분홍, 노랑, 파랑, 연두색으로 뒤엉켜 울어댔다.
 
한 마리에 오백 원.
 
졸음에 겨운 눈으로 노인네는 웅얼거렸고, 나는 그가 어쩌다 학교 앞에서 병아리나 팔게 되었는지, 저 나이까지 살면서 병아리를 파는 것이 그의 인생 목표였는지 따위를 잠시 생각했다.
 
주머니에 든 오천 원은 아버지가 문제집을 사라고 준 돈이었으나 어차피 문제집을 사건 담배 두 갑을 사건 밤에 소주를 마시면 아무 상관도 없어서 나는 병아리 열 마리를 샀다. 무감각하고 무자비한 손으로 병아리는 휙휙 내던져져 봉투 속에 담겼다. 꿈틀거리는 촉감에 기분이 나빠서 나는 서둘러 집 옆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그만큼 가느다란 목에 감겼고, 약하지만 따뜻한 맥박이 심장까지 다다르기 전에 뚜둑, 하고 꺾어 버렸다.
 
하나, 둘, 셋, 넷.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그가 문득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죽은 새의 새끼를 아직 살아 있는 새끼들이 담긴 봉투에 집어넣었다. 서둘러 담배를 비벼 끈 그를 나는 멍하니 노려보았던 것 같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가 내 손목을 세게 붙들었다.
 
그 뒤로는 으레 손찌검이 따라오곤 했다. 여태껏 그랬듯이. 나는 익숙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아픈 것은 아닌 폭력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생명에는 죄가 없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아서, 나는 그만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3.
 
기실 개나 고양이의 목숨은 이제 인간보다 중하다. 밥도 좋은 것으로, 잠도 좋은 곳에서, 아프면 병원도 좋은 곳으로 다닌다. 게다가 개나 고양이는 자기가 왜, 어째서 태어났는지를 고민하지도 않는다, 아니 못한다(아마?).
 
개나 고양이는 아마 길에서 죽어갈 때에도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왜 나는 따뜻한 밥도 먹지 못하고, 따뜻한 밤도 보내지 못하는지, 왜 나는 내가 고르지도 못한, 고를 기회도 없었던 삶에 주어진 멸시와 폭력을 버텨야 하는지, 왜 나는 밤마다 좁고 추운 방에서 소주병이 깨지는 소리와 고성을 들어야만 하는지를, 왜 나는,
 
개와 고양이는 그저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고르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들도 마찬가지지만, 그것을 인식할 지능이 없다. 그저 그렇게 순간과 순간을 살다가 - 그리고는 잊어버린다. 죽음이 오면 마침내 전부를 잊어버릴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철창 안에 갇혀 있다가 동물단체가 와서 구해 주기도 한다.
 
부러운 존재라고 나는 이야기했다.
 
그러면 그는 항상, 그, 보고 있으면 굉장히 멍청해 보이는 표정으로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되게 우습다. 제딴에는 진지하게 보이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옴쭉달싹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러려면 대학은 뭐하러 갔어요, 병신같이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나는 이죽거리곤 했다.
 
그러게.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씨팔, 맨날 담배만 존나게 피워요. 나도 줘.
 
그러면 그는 어딘가 죄라도 저지른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보긴 누가 본다고.
 
미안하다.
 
나는, 그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4.
 
내가 죽인 길고양이나 혹은 내가 그은 손목을 볼 때마다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신부도 목사도 선생도 의사도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잡는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무언가 말을 끊임없이 한다.
 
그러나 괴로운 표정으로 미안하다고만 지껄이는 소리에는 짜증이 난다. 나한테 왜 미안해야 하는지를 나는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고 했다. 제대로 된 가족이 있어서? 굶어본 적이 없어서? 개도, 고양이도, 병아리도, 잠자리도 죽여 본 적이 없어서? 맞아 본 적이 없어서? 고른 적 없는 내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어서? 추운 방에서, 그 방에서도 쫓겨나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따지고 들면 그는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고는 물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주워섬긴다. 신이나 철학이나 어쩌구, 저쩌구, 제풀에 지쳐 담배나 피우고 만다. 때로는 맥주나 담배를 사다주기도 한다. 돈을 달라면, 있을 때는 돈을 준다. 자주 받지는 않지만. 나도 거지는 아니거든.
 
한번은 마구잡이로 두들겨 팬 적도 있다. 짜증나잖아. 뭘 안다고. 누가 동정해 달랬나? 누가 이해해 달랬나?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할 일에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은, 열받는 일이다. 어려운 말로, 뭐라더라, 오만한 일이다.
 
한참을 때리고 나니까 그는 울고 있었다. 병신같이. 군대도 다녀온 다 큰 남자가 애새끼마냥 징징대고 있는 것이다. 왜 우냐고 물으니 아파서 울었단다. 병신새끼.
 
삶은, 생명은 폭력이야.
 
누가 그래요.
 
내가, 이 씨팔놈아, 내가.
 
5.
 
니가 만약 병신으로 태어났다고 해 봐. 팔이나 다리가 없거나, 귀나 눈이 멀었거나, 혹은 니가 병신이라고 인지할 지능도 없다고 해 보자. 그 삶은 복이야? 축복이야? 아니면, 그런 사람 앞에서도 너는 미안하다고 이야기할 거야?
 
너는 대체 무엇을, 무엇에 대해 미안해하는 거야? 니가 병신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감히 온전한 몸으로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며 삶을 감상하는 일이 미안하다는 거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런 생명과는 말을 섞지 마, 네 존재 자체를 들이밀지 마. 왜 너는, 굳이 얼굴을 들이대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왜, 그런 말을 하면 네 기분이 나아져? 꺼져 버려, 아니, 차라리 그냥 죽어 버려. 제발, 내 앞에서 꺼져 줘. 나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아, 너의 말도, 너의 존재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런 말을 하면서 스스로가 더 나은 존재라고 느낀다면, 너의 기분이 나아진다면, 너의 죄책감이 덜어진다면, 나를 이용하지 마.
 
만약 낙원이 있다면, 그 낙원에서 주님이 허락하사 모두가 정상적이고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면, 누구도 다른 누구를 동정하지도 사랑하지도 연민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다면 – 낙원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테지만 – 그제서야 얼굴을 비춰 줘, 그 낯짝을 들이밀고 내게 인사를 건네 줘.
 
당신은 대체 무엇을 미안해하는 거야? 아니, 혹은
 
당신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야.
 
그런 말을 나는 지껄였다. 그를 두들겨패면서.
 
말의 끝에, 그는 언제나처럼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두려워.
 
뭐가 두려운데?
 
내가 죽는 것이.
 
죽는 것은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받은 적 없는 – 그래, 선물을 –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 하는 일은 어처구니없다. 그것은, 애초에 너의 것인 적이 없는 일을 ‘되돌려받는’ 일이다. 누가 되돌려받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어머니와 아버지겠지. 나를 던진, 던져낸 이는 그들이다, 그런데
 
그런데 – 그들이 되돌려받는지는 모르겠다. 죽어버린 이는, 다만 그뿐이다. 죽으면 다만 그뿐이다, 나는 생각한다.
 
죽은 이는, 다시 말해 되돌린 이들은 아무것도 되돌려받을 수가 없다.
 
6.
 
사랑을 저주라고도, 도둑이라고도 한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기실, 세상에는 많은 말과 그 말을 담은 수많은 정의가 있다. A는 B다, C는 D다, 다시 D는 A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다. 손가락의 끝에서부터, 성기의 끝에서부터, 눈과 귀의 끝에서부터 자극은 척수를 타고 뇌로 전해진다. 글을 쓰는 것은 그 반대다. 뇌에 무언가가 잔뜩 쌓인다. 그리고 그것을 역으로 뱉어내는 것이다. 눈으로든 입으로든 귀로든 성기로든 – 아마 대부분은 손 끝으로. 끓는 물에 손을 담근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앗, 뜨거, 하고 바로 손을 뗀다, 잔뜩 쌓이면 그것은 정액이나 소변이나 대변과 같이 오래 참을 수는 없다. 무언가가 쌓이면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나는 더 이상 쌓인 것이 없다. 텅 빈 내가 무엇을 말한다는 일은 그저 우습다. 나는 더 이상 쌓인 것이 없다, 내가 말하는 단어는 그저 비어 있다. 그저 무언가에 계속해서 쫓기기에 나는 쓴다. 다만, 다만, 다만.
 
다만 그뿐이라고,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생각했다.
 
7.
 
생은 죄고 삶은 그 벌이다. 내가 고른 적도 없는 죄다. 대가리가 좀 굵고 나서 아버지 서재에서 읽었던 책들에 나와 있었다.
 
아버지 서재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싶다.
 
나는 그를 모른다. 매일을 술과 담배로 불태우며, 스스로 벌지 못한 돈으로 살아나가는 그가 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비싸지 않다. 얼마나 낡디낡았던 아무 소용도 없다. 박스 하나에 가득 채워 팔러 갔을 때에, 점원은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무게를 달았다. 안에 오만 욕설이나 저주가 가득 쓰여 있었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글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이나 악마의 복된 말이 페이지마다 적혀 있었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1Kg에 얼마, 내가 쥔 돈은 삼만 오천 원이었다. 담배를 사고 술을 사기에는 아무래도 좋은 돈이다.
 
무언가를 쥐고 사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그렇게도 험하게 다룰 수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이 소중하게 남긴 말도 천 년 뒤에는 그저 썩는 간과 타는 폐가 될 뿐이다. 모르겠다. 죽고 나면, 삶을 반납하고 나면 어차피 글이건 그림이건 노래건 팔리든 말든 알 길도 없잖아. 안 그래?
 
손목을 그으면 피가 흐른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조금 흐르다가 만다. 그것이 깊게 흐르기 위해서는 흐르는 물이나 뜨거운 물에 담가 두어야 한다. 그러면 피가 멎지 않고 계속 흐른다. 한번은 해 보았다. 굉장히 졸렸어. 그 전에, 수도세가 많이 나온다고 아버지가 내 귀싸대기를 후렸다.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어쨌든, 피가 흐르면, 따뜻하다, 그걸 알아? 굉장히 따뜻해. 어느 여름날, 목이 잘린 고양이의 잘린 목의 단면에 꿈틀대던 구더기처럼 몸부림치듯이 손목과 팔뚝을 타고 흘러내려.


8.
 
삶은 아름답고, 추악하고, 감사하며, 죄스럽고, 안쓰럽고, 대견하고, 부질없고, 그럼에도 의미가 있다.
 
있다고들 한다. 모르겠다, 나는, 도저히 모르겠어. 삶은 그저 죽어감의 다른 이름인가? 천천히, 혹은 빠르게, 죽어감의 다른 이름일까. 나는 무엇이 미안할까.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니며, 그리고 그 태어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른 태어남을 집어삼켜야 하는 태어남에는 어떤 가치와 윤리와 도덕과 의미가 있을까? 그가 약한 병아리의 목을 하나씩 꺾을 때에, 그런 꺾음이 생의 숙명이라고 믿는다면 내가 생명에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무엇이 약하고 역하고 선하며 강하다고 기준을 정할 자격이 내게 주어져 있는가. 죄는 어디에 있을까. 삶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이 자유니 사랑이니 말할 자격이 있을까. 삶이 죽는 법을 가르친다고도 하지만,
 
나는 죽기 싫다.
 
죽음은 너만의 죽음이 아니다. 죽음은 단순히 너에게 주어진 생명의 끝만이 아니야. 죽음은, 네게 주어진 온 세상의 끝이야. 그 끝에는 너의 죽음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네가 알아온, 너를 알아온 그 모든 이의 끝이야, 진지하게 말하면 그 모든 이의 삶‘들’의 끝이야. 네가 죽으면, 네가 포함되어 있던 그 모든 세계가 막을 내리는 거야. 너는 더 이상 무엇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맛볼 수도, 증오할 수도, 사랑할 수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 너의 의지 자체가 박탈되는 거야. 너의 모든 감정도 너의 모든 미래도,
 
그래, 가능성도.
 
너의 죽음은 단순히 너의 죽음이 아니야. 너의 죽음은 너의 세계의 죽음이야.
 
9.
 
아버지가 죽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약오름을 느꼈다. 약오름이라고 해야 할까, 나도 잘 모르겠어. 억울함, 그래, 억울함이 맞을 것 같아. 가져갈 것을 가져가지 못하고 홀로 떠나 버렸잖아.
 
‘뿌린 대로 거두리라.’
 
왜 당신은 거두지 않았어? 왜 뿌린 씨를 거두지 않았지?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야지.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증오에 차서 나는 앉아 있었다. 더 맞지는 않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애써 분을 삭였다.
 
장례식은 금방 끝났다.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그는 의리도 없었으나 찾아와 주었다. 왜 찾아왔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 차림으로 젠체하며 ‘이게 사람 사는 도리야.’ 하고 말했다. 그딴 예의는 필요하지도 않았는데.
 
그제서야 나는, 이제야 내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른 적 없는 생의 고리가 끊겼으니까, 이제 미련이 없다고.
 
그래서 나는 텅 빈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남지도 않은 세간을 정리하자. 그러면 나는 비로소 자유롭다고. 발을 디디고 어째선가 나는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삶은 허무다. 삶은 죄악이다. 삶은 곧 죽음이다. 삶은 폭력이다. 삶은 축복이다.
 
많은 얼굴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중 어느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를 나는 몰랐다.
 
삶은 가능성이다. 삶은 희망이다. 삶은 절망이다. 삶은 초월이다. 삶은, 삶은, 삶은,
 
애처롭고 괴로운 얼굴로 그가 서둘러 뛰어 들어왔다. 목을 맬 수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수도, 방문과 창문을 막고 연기를 태울 수도,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 들 수도 있었지만 대신 그는
 
미안하다, 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생에는 죄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손목을 그을 수도, 개를 키울 수도, 노래를 할 수도, 증오할 수도, 강요할 수도, 춤을 출 수도, 술을 마실 수도, 담배를 피울 수도, 달릴 수도, 기타를 칠 수도, 목을 매달 수도,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입을 맞출 수도, 울 수도, 웃을 수도, 기도할 수도, 산책을 할 수도, 잠을 잘 수도, 그리고, 사랑을 할 수도.
 
살아라, 나를 위해서, 살아 줘.


누군가를 잡아먹으면서도 애써 살아 줘.


어쩌다보니 항상 위로를 하는 입장에 서곤 했다. 내게 대체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억지로 쥐어짜낸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어서, 나는 그게 두려웠다. 삶에 고민하는 이에게 던져져야 할 위로는 삶을 아는 자에게서여만 한다, 적어도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있는 자에게서여야만 한다.


서사 없는 넋두리를 싸지르며,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는 태어남에 감사함을 느낀다고 했다. 누군가는 태어남에 죄송함을 느낀다고 했다. 생은 죄악이며 차라리 얼른 죽어버리는 것이 생의 주인에게 있어 오히려 윤리적이라고 말한 이도, 죄악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생은 죄냐고 물었을 때, 한 이는 이런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상대가 거부하지 않는 한 뒤질 때까지 도울 것이고, 만약 그가 죽어 버린다면 징징 울 거라고.


그렇게까지 강하기에, 나는 그를 존경한다. 자신의 목숨을 담대히 걸고 우뚝 서 남을 돕겠다고, 그럼에도 스스로의 약함을 숨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에, 나는 질투와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다.


기실 나는 강하지 않다. 강했던 일도 없다. 언제나 비웃음과 냉소 뒤에서 떨며, 그저 미안하다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삶이 무엇인지도 죽음이 무엇인지도 나는 모른다. 다만,


한 소설가가 말했듯이,


자신을 가지고 살아가자.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가 죄인이니.





작가의 이전글 산타모니카 드림에 작별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