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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Jul 14. 2019

아롱이에게

W에게 바침

믿거나 말거나인 이야기지만, 가끔 미래에서 친구가 찾아온다.

이 친구란 놈은 어쩌다보니 알게 되어서 벌써 8년째 알고 지내는 사이인데, 술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점만 빼면 괜찮은 녀석이다. 그 날도 어김없이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하며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친구는 어찌 된 일인지 말이 없었다. 뭐,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 생각에 잠긴 것 같아서 담배나 피러 가자고 어깨를 쳤더니, 갑자기 눈에 생기가 돌아오더니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것이 아닌가.

뭐야, 미친놈아. 새 술주정이냐?

아니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잠깐 졸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대학생 때 다니던 술집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최근 들어 자주 보지 못한 친구가 앉아 있더라나. 너무 반가운 나머지 크게 소리까지 질러가면서 내 손을 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야, 가만 있어, 돈도 없는 놈이, 내가 살 테니까.

지금 들어가 있는 몸은 똑같이 돈 한 푼 없는 대학생이란 것을 까먹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가 술값을 계산했다. 어쨌든, 나로서는 불평할 거리가 없었다.

그 뒤로도 그는 자주 찾아왔다. 오는 시점은 모두 달랐지만. 정확한 얘기는 잘 듣지 못했다. 애초에 내가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알아서 어디다 쓰냔 말이다.

그래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자주 해 주더라.

너, 스물일곱에도 백수야.
너, 2020년에 동대문 쪽으로 이사가. 월세가 50이라던가, 60이라던가. 무리하는 것 아니냐?
너, 내년쯤에 여자친구랑 헤어져. 그리고 밤에 나한테 전화해서 개지랄해.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친구가 미래에서 찾아온 동안, 지금의 친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나도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날부터인가, 친구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세상살이는 길고, 인연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연이 끊겼을 수도, 크게 싸웠을 수도, 서로 많이 바빴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팔 년이란 시간도 꽤나 긴 시간이니까.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태평한 얼굴로 술을 마셨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좀 흐르고, 담배를 피러 갈 시간쯔음에.

오랜만이다, 하고 머나먼 미래에서 친구가 말을 걸어 왔다.
오랜만이네, 아니, 오랜만이에요.
갑자기 존댓말은, 어색하게.

픽, 하고 우리는 서로 웃었던 것 같다.

요샌 잘 안 오던데?
그게 내 맘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뭐.
그렇겠지.

말없이 우리는 술을 마셨다. 서로에 대한 것은 원래도 잘 묻지 않았으니까.

별 소식은 없고?
음, 이제 꽤나 오래 전 이야기라. 아, 그래. 올해가 몇 년이지?

2019년 여름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아, 그러면 내후년쯤에 취직할거야, 아마도.
다행이네.

그럼.

술값을 계산하고 그는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본다, 야. 앞으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씨팔, 보면 되지, 말은.

떠나려는 그를 붙들고, 잠시간 우리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끊어야지, 하고 그는 이야기했다. 개가 똥을 끊으면 끊었지, 하고 나는 대꾸했다. 

지금의 그인지 미래의 그인지, 어디로 가는 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휘청대며 걸어갔고

나도 집으로 향했다.


아무튼, 그런 것이다.

나는 믿기 싫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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