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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Jul 17. 2019

KARAWANE

1. 



1일차


돌아가면 – 살아 돌아가면 – 기필코 이 쇳덩이를 도살장에 팔아 넘기리라. 


찌는 듯한 더위에 이름 모를 사구에서 눈을 떴을 때엔, 이미 두 번째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계절을 넣어 계산해 보니 대충 02시 정도 된 듯하다.  여기가 정확히 어딘가 하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지랄같은 사막에서 중요한 곳 따위 있을 리가 없으니까. 돈보다는 당장 죽겠다는 공포가 미친 듯이 몰려왔다. 머리가 아프다 – 안과 밖 모두. 짐승은 어디로 갔지.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더라.


대상隊商은, 기점에서 물자와 ‘상품’을 싣고 5행성일 정도 머무른 뒤, 사막을 지나 중간지점에서 연료와 물자를 보충해 행성 끝의 항구로 향할 계획이었다. 세관도 이미 매수해 두었고, 복잡한 절차니 서류니 하는 것도 상단장이 – 지 말로는 – 다 해결해 놓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이걸 떼다가 저기서 바꾸고 저걸 떼다 여기서 팔아치우는 거다, 그게 전부다. 어쨌든 내가 들은 바로는 그랬다. 알 필요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불법이냐고? 당연히 불법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대체 무슨 이유로 짐승들의 기어가 무뎌지도록 짐을 바짝바짝 실어올리고, 평소라면 누구도 발을 디디지 않을 사막을 더위와 추위를 뚫고 가로지르겠냐는 말이다. 불법은 돈이 된다. 다만 그뿐이다. 내가 맡은 일도 다만 그뿐이다. 자세한 건 알고 싶지도 않다. 제대하고 벌이가 마땅치 않던 차에 군대 있을 때의 선임이(나중에 들으니 그는 진작에 이 짓거리에서 손을 뗐단다. 영악한 새끼.) 추천해 준 게 이거였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어쨌든 첫 닷새는 그의 말대로 흘러갔다. 겉보기에 우리는 장신구니 비단이니 향신료니 하는 잡다한 것이나 나르는 평범한 상단에 그치지 않았다. 


가서 대충 돈이나 펑펑 쓰다 오라고, 가 명령이었다. 나를 비롯한 용병들은, 상인의 두건을 뒤집어쓰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헐값에 팔아넘겼다. 시장의 좌판에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술집에서. 멍청한 모래놈들은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을 무어라 지껄이며 술과 음식을 끊임없이 권했다. 그동안 상인들은 뒷골목에서 착실히 상품을 거래해 싣고 있었으리라. 나야 손해 볼 일 없었다. 재미나 신나게 봤으면 봤지. 총은 들 필요도 없었다.


사막에 들어서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60 중반의 돌처럼 단단한 용병대장 – 용병대라 봤자 나와 그를 포함해 여섯뿐이었지만(사람이 많아 봐야 이목만 끌 것이라는 상단의 판단에서였다) – 은 갑자기 마시던 술병을 짐승 대가리에 깨부수고는 내 쪽을 향해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총 들어, 이 새끼야. 놀러 왔어? 


병신 같은 새끼가, 지난 닷새 동안 술에 꼴아 내내 주정이나 부리더니 갑자기 인상 팍 쓰고 지랄이네, 하고 생각했지만, 뭐, 아무튼 놀러 온 건 아니었으니까.


놀러 온 게 아니었다. 사막은 진짜 장난이 아니었다. 낮에는 춥고 밤에는 덥다. 얼어붙은 태양이 하늘 위로 높게 떠오르면 다들 방한복을 두껍게 싸맸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모래가 칼처럼 눈과 귀와 콧구멍에 사정없이 파고들었고, 밥에서는 모래가 우적우적 씹혔다. 밤에는? 불타는 달이 사람을 산 채로 구워 댔다. 짐승들의 와이어에서 삐걱대는 신음소리가 나고, 철판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솟았다. 왜 그럼 저걸 태양이라 부르고 저걸 달이라 부르지, 하는 생각도 머리가 몇 번 얼었다 익었다 하는 사이 사라지고 말았다.


30행성일, 540시간. 아무 변수가 없고, 능력 있는 길잡이가 행렬을 이끌 때 (상단의 책임자는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뻥뻥 쳐댔다) 계절을 잘 잡는다면 최단 루트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데 30행성일이 걸린다. 와, 더럽게 기네. 막막했지만 어디든 전쟁터보다야, 일이 없어 뒹굴거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어디가 사막이 아니었다면 좀 더 나았겠지만. 


너는 그냥 따라 다니면서 총 들고 폼이나 잡다가 오면 돼. 별 좆도 없어. 끽해야 도마뱀이랑 새 몇 마리뿐인걸. 불침번이야 군대에서도 많이 섰잖아, 응? 30일 동안 뺑이 좀만 치면 1년치 봉급이 한큐에 들어온다니까? 1년치 봉급이! 씨팔, 계산을 해 봐라. 빌빌대면서 동네 양아치 짓 하느니 나가서 바짝 고생 좀만 하면 야, 이게 얼마야. 말이 좋아 30일이지, 하루 18시간이면 얼마야, 모르겠네, 하여튼 20일정도만 딱 고생하면 돼. 내가 니 아끼는 거 알지? 이거 아무나 소개시켜주는 거 아냐 임마.


그래, 이 시방새야. 군대에서도 후임들한테 사기나 치기로 유명한 새끼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다. 애초에 그럴 수도 없다. 이 사막에서 길을 아는 건 상단의 우두머리뿐이었으니. 30행성일, 바짝 버텨서 저 끝까지만 가면 보수 받고 집에 가면 그만이다. 그 생각으로 짐승의 등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모래를 뚫고 튀어나오는, 뭐라더라, 이름도 까먹었다, 눈은 여섯이고 발은 여덟인, 도마뱀과 지네가 눈이 맞아(그러면 안 된다) 싸지른 어떤 동물에다 총알 몇 방 먹여주면 그만이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총에 맞으면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돌다가 나자빠져 뒈진다. 밤낮으로(낮밤으로?) 아무 데서나 갑자기 튀어나오는 게 좀 짜증나긴 했지만. 


염병, 올해는 유독 지랄이네. 야, 신삥, 졸지 마. 뒈지고 싶어?


네, 좆까세요. 나는 말린 과일을 씹으며 용병대장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날씨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지만 – 모래 폭풍, 번개, 갑작스러운 땅울림 - 어쨌든 짐승의 움직임엔 어떤 안정적인 리듬감이 있어서, 몸을 내맡기면 잠이 오긴 왔으니. 모래, 모래, 모래, 모래를 지나서 가다가 해가 뜨면 캠프를 세우고 불침번을 서거나 잔다. 그리고 다시 모래, 모래, 모래. 시간아, 빨리 좀 가라. 


이봐, 이번엔 좀 심한데. 이거 왜 그런거요? 


모닥불 가에서 용병대장과 상단이 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위험수당 어쩌고. 위험할 일이 대체 뭐가 있다고. 주기가 짧으니 잠도 덜 잘 수밖에 없었지만 뭐, 쪽잠이야 군인의 숙명이지. 


위험할 일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다음 날. 그 위험한 일이란 앞서 말한 그 끔찍한 잡종을 말하는데, 생긴 게, 음, 좀 달랐다. 눈이 세 배나 많았고 발은 다섯 배는 많았다. 뭣보다 입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모래 속에서 뭔가 움찔움찔거리더니 불쑥 튀어나와 행렬의 가운데를 덮쳤다. 놀란 상인들과 짐 싣는 짐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행렬 전방의 용병대장이 침착하게 총을 들어 갑작스러운 방문객의 미간(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에 대고 총을 갈겼다. 끔찍한 비명을 내며 놈은 몸부림쳤고, 나머지 용병들도 총구를 그쪽으로 향했다. 별 것도 아니네, 금방 조질 수 있겠어. 


내가 타고 있던 짐승에게는 별것이었나 보다. 엉덩이 아래에서 불안스런 떨림이 느껴졌고, 기어가 끼릭거리더니, 꾸에엑 하고 괴성을 지르며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급히 고삐를 쥐고 홱 꺾었지만 이 고철에게는 인간이 감히 꺾지 못할 강력한 의지가 잠재되어 있었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동안 몰라봐서 미안하다, 시발아.


어쨌든 몇 십 킬로미터를 삼십 분 만에 주파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목줄을 바짝 쥐고 있는 것뿐이었다. 신호탄, 신호탄이 어딨더라. 주머니를 황급히 뒤적거렸지만 하도 날뛰는 통에 그만 떨어트리고 말았다. 긴 질주 끝에 짐승은 지쳤는지 갑자기 발을 멈추었고,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물리학의 법칙 때문에 부드러운 모랫더미로 휙 나가떨어졌다. 나? 나라고 무사했을 리가 없다. 차라리 나도 모랫더미로 떨어졌으면 좋으련만.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것을 보니, 고삐를 제때 놓지 못해 모가지 아니면 대가리에 들이받았나 보다. 그래, 아마 제일 합당한 설명이리라. 그 뒤의 기억이 모두 날아가버린 것을 보니까.


지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짐승은 애처롭게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하늘을 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를 결심했다. 돈이 얼마나 들든 간에 저걸 꼭 데려가 도살장에 팔아넘기겠다고. 합금 몇 근에 와이어 하면 돈 좀 만질 수 있겠지.


상황은 절망적이다. 식량, 이건 그나마 사정이 낫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흘 먹을 정도는 있다. 불침번을 서다 보면 입이 심심할까봐 이것저것 잔뜩 꼬불쳐 놓았고, 마을에서 기념품으로 산 말린 과일도 몇 팩 있었다. 물도 마찬가지다. 짐승의 엉덩이 쪽 트렁크에 가득 실어 놓았다. 충격으로 연료통이 깨져 섞여 버리지는 않았을까 했지만 다행히 무사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식량과 물을 다 쓰고 나면, 그럼 뭐? 내가 언제 구조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 넓은 사막에서 날 찾을 수나 있긴 한가. 아니,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아예 오지도 않으리라. 뭣하러? 싸구려 용병 한 놈 실종됐을 뿐인데. 그 한 놈 찾자고 이 사막을 뒤지고 다니자고? 것보다 얼른 가서 물건이나 팔아치워야지. 그렇잖아? 더러운 밀수꾼 새끼들아.


그렇다고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나를 흔들어 떨어트리려는 짐승의 머리로 기어 올라가 최대한 하늘 높이 손을 내뻗었지만 신호가 닿을 리가 없다. 배은망덕한 짐승놈이 머리를 흔들어 땅바닥에 얼굴이나 닿았을 뿐이다. 가지고 있는 모든 기기들을 살펴본다. 신호탄, 잃어버렸고, 휴대용 송신기, 전파가 닿지 않고, 위성탐색망, 이 미개한 행성에 신호국이 있을 리도 없고, 생체신호, 열 격차가 너무 심해서 탐지도 안 될뿐더러 그놈들이 날 찾으러 올 이유도 없다. 그냥 타고 한쪽으로만 계속 달려? 미친 짓이다. 이 행성의 70%는 사막이고 나머지 20%는 바위산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 짐승의 목에 접이식 안테나가 있었던가. 구형 모델이라 없었다. 시발, 시발, 시발. 하여간 도움이 안 돼, 이 병신 같은 고철은, 하고 다리를 걷어찼으나 거지같은 놈이 꾸에엑 소리를 내며 부리로 내 머리를 찍었다. 피가 다시 터져 흘러내렸다. 


괜히 힘만 뺐네.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최대한 물과 음식을 아껴 먹으면서, 억지로 짐승의 날개를 펴고 그 위에다 판초를 덮고 온도조절장치를 켰다. 연료도 아껴 쓰면 이레 정도는 최고 속력 뽑겠지. 불만스럽다는 듯 짐승은 날개를 털었지만 뒤통수에 총알을 몇 방 먹여 주니 잠잠해졌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니 때문이야, 니. 알아? 둘 다 살아서 가자고 내가 지금 물, 식량, 연료 나눠서 학교 다닐 때도 안 하던 계산을 하고 있잖아. 


어쨌든, 조난 1일차 기록 끝.


2일차


사막에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 걸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당연하지만) 바람에 죄다 지워져 버렸다. 하늘을 보고 어림짐작으로 마을이 있으리라 믿는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짐승은 저도 못 견디겠는지 볏을 폈다. 태양광 발전판이다. 저건 그나마 달려 있었네. 효율이 얼마나 날지는 모르겠다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사막은 검게 입을 벌리고 있다. 어릴 적 책에서 본 옛 지구의 사진에서는, 사막에는 선인장이라는 풀이 있댔다. 그걸 자르면 즙이 나오고 그걸 물 대신 마실 수 있다고. 


그딴 건 없다. 심지어 선인장 옆에서 나뒹굴던 뼛조각도 없다. 


짐승에는 기계가 내는 열기가 있다. 바짝 달라붙어, 발톱에 채이지 않게 조심하면서 잠을 청한다. 도마뱀이 기어 나와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기에 총을 갈겨 주었다. 픽, 하고 피가 튀며 모래를 적신다. 치익, 하는 불길한 소리가 난다.


저건 먹을 수 없겠군.


오늘도 계속해서 걸었다.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마을이 남쪽에 있었으니까, 

모르겠다. 어쨌든 저쪽으로 가면 되겠지. 지도도 없다.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갔더라. 마을에서 북쪽으로 갔다가, 아니 서쪽이던가. 사막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너무도 막막한 일이 아닐까 싶다. 


새벽에 – 새벽이 정확히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시계는 새벽이란다 – 멀리서 처음 들어 보는 소리가 났다. 깊게 울리는 소리다.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도 가슴 속에 한참이나 울렸다. 


날 잡아먹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3일차


다행히 온도조절장치가 제대로 작동한다. 왜 안테나는 달지 않았지? 노숙자가 개조해 타고 다니던 놈이 틀림없다. 길바닥에는 집도 없고 연락할 사람도 없으니까. 근데 지금은 그 노숙자가 부럽다. 적어도 이 염병할 사막에 있지는 않으니까. 시발놈의 새끼들, 줄 거면 신품으로다가 좀 주지, 그거 한 푼 아끼자고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중고품을 타라고 주나?


사막에는 아무것도 없다. 죽음도 없고 생명도 없다. 저 일그러진....... 움직이는 것들을 생명이라 부를 수가 있을까. 여기에는 모래, 모래, 시발 사방 천지를 둘러봐도 염병할 모래뿐이다. 찐득찐득한 모래가 움푹 들어갔다가 사르르 흘러내리고 어딜 가나 그 지랄이다. 소리도 없고 낮도 없고 밤도 없고 그냥 더위와 추위밖에 없다. 입을 벌리고 점점 넓혀 나가는데 나도 그 속에 빠져 버릴 것만 같다. 난 모래가 싫어.


계속해서 기록을 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배터리 걱정을 하는 건 아니다. 시계는 반영구적이니까. 다만, 


모르겠다. 계속해서 걸었다. 



4일차


기계에게 영혼이 있다면 이 짐승에 깃든 놈은 더럽게 멍청한 놈이 틀림없으리라. 어제는 밤에 어딘가를 바라보며 구슬프게 낑낑거렸다. 대체 뭘 바라는 건지.


어쩌면 제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고철더미한테도 죽음은 두려운 건가?


5일차


집에, 우리 부모는 지구에서 온 사람인데, 하여튼 「지구」라는 책이 있었다. 50년도 더 된 책이었다. 어릴 때 시도 때도 없이 들춰 봤던 책 속 지구는 파랗고 녹색이었고 온갖 짐승들이 있었다. 낡은 책장을 들추다 살짝 찢어먹은 날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귀싸대기를 맞았다. 그 뒤로는 몰래몰래 아버지의 방에 숨어들어 보았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이 책은커녕 종이가 뭔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그 뒤로는 아예 읽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반절은 찢어져 있던 책인데. 그에게는 소중했었나 보다.


‘바다’ 섹션에서 말하기를, 한때 고래라는 생물이 있었다고 한다. 어마어마하게 크고, 거대하고, 또, 또, 음, 하여튼 컸다. 사막의 지네와 도마뱀 잡종보다도 세 배는 컸다. 그 큰 게 바다를 헤엄쳤다고 한다. 뉴스에서 본 지구의 바다는 검었고, 어떤 생물도 더는 다니지 못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상하게 이 동물에 매혹되었다. 어릴 적에.



7일차


계속해서 걸었다. 덥고 춥다. 배도 고프다. 식량과 물의 2/3정도가 사라졌다. 아껴 먹으면 아마 나흘 정도는 더 버틸 수 있겠지.


다행히도 날씨는 꽤나 얌전하다. 저 멀리서 폭풍이 몰아치긴 하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는 오지 않는다. 젠장,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별도 못 읽겠다. 지금쯤 다들 어디쯤 있으려나? 방향 잘 잡아서 가다보면 만나지 않을까? 두통이 너무 심하다. 약은 없는데. 멀리서 자꾸 울리는 소리가 들려서 어딘가 오싹해진다. 나만 듣는 소리가 아니라 다행이지 싶다. 


기록은 계속 남길 생각이다.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몰라. 틀어 놓으면 누군가와 대화하는 느낌이라 좋다. 


11일차


어릴 때의 이야기다. 어릴 때의 이야기.


고래가 하루는 너무 보고 싶어서 어머니에게 고래를 보러 가자고 졸랐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 보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고래가 보고 싶다고 했다. 고래는 뭘 먹어요? 바다에서 어떻게 헤엄치는 거예요? 고래는 얼마나 커요? 아빠보다 커요? 


아니,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고래는 하늘을 날아. 고래는 별을 먹지.


개소리 하고 앉았네, 하고 나는 지금 생각한다. 지금은 다 상관없는 이야기다. 고래도 죽었고 아버지도 죽었고 나도 곧 죽을 것이고 이 병신 같은 짐승도 발전기를 빳빳이 세우고 어떻게든 버티다 죽어 버리겠지. 


어릴 때의 이야기다.



13일차


음식이 바닥을 보인다. 물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아직도 사막을 맴도는 중이다. 맴돈다? 그럴지도, 아닐지도 모르지. 어쨌든 가고는 있다. 짐승의 걸음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총알은 넉넉하게 남아 있다. 혹시나 모르니까.


검은 총구가 친숙하게 느껴진다. 나는 짐승에게, 총구에게 말을 건다. 계속해서. 혼잣말일지도 모른다.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만 남은 물이 없어 그럴 수도 없다. 




멀리서 쿵, 쿵, 하고 육중히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쟁터다! 차라리 거기엔 적과 죽음이 명확했어. 적 포격, 실드 켜! 쿵. 좋아, 빗겨갔다, 야, 정신 똑바로 차려. 쿵, 쿵. 분대장님, 포격이 가까워집니다! 모두 엄폐하라! 쿵, 쿵, 쿵. 적이 코앞입니다! 제길, 후퇴다! 후퇴! 

쿵, 쿵, 쿵, 쿵. 


쿵.


Hej, tatta gorem! jolifanto, tatta gorem!


외계인인가? 아냐, 과학자들은 아직 지성을 가진 생명체를 발견하지 못했어. 사막 같은 거니까. 우주도 하나의 사막이지. 사막엔 생명이라곤 없어. 드넓게 펼쳐진 모래에 있는 것은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우리들뿐이야. 


gorem, gorem! hollaka, hollaka! 


나는 지금 천천히 미쳐가고 있구나. 어쩌면 저게 지구의 말일지도 몰라. 우리의 조상들이 시처럼, 노래처럼 읊조리던,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말. 


blago, blago! bung bosso fataka!


무언가가 내 볼을 때렸다. 도마뱀인가, 이제 천천히 내 살을 녹여 먹겠지. 아니면 짐승일지도 몰라. 네놈을 꼭 데려가 뼈와 살을 발라 놓았어야 하는데. 왜, 너도 배고프냐? 개새끼야, 이 꼴이 난 게 애초에 누구 때문인데. 배은망덕한 고철덩이가. 


톡, 톡.


wubulu, wubulu. 


톡, 톡, 톡.


WUBULU! hej, schumpa gasa wassier. 


작은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무언가가 뿌우, 하는 소리를 내고 주변이 소란스럽다. 정글, 정글이다. 나는 죽어서 정글에 와 있구나. 이름 모를 외우주의 행성의 정글 말고, 진짜 동물들과 진짜 인간들이 살았던 옛 지구의 정글에. 팬티만 두른 인간도 말하는 흑표범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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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차


나는 살아있다.


16일차


눈을 떠 보니 흰 공간에 있었다. 바닥에는 형형색색의 천이 깔려 있다. 빛이 새어 들어오고 나는 눈이 부셔 그만 질끈 감아 버렸다.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린다.


처음 보는 이들이 무언가를 가져다 tumba, tumba,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다. 내가 멍청히 누워만 있으면 고개를 저으며 쯧쯧 소리를 낸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입 안에 무언가를 흘려 넣는다. 반항할 기운이 없어 얌전히 받아 삼킨다. 희미하게 달콤한 향이 풍긴다.


18일차


간신히 눈을 떠서 시계를 확인하고 18일째임을 확인한다. 눈을 뜨니 어둡고 여전히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다. 나지막한 말소리, 노랫소리 같은 말이 장막(네모난 공간은 흰 천으로 둘러싸여 있었다)을 뚫고 가끔 새어 들어오고,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팔 소리 같은 것도 들린다.


20일차


나는 살아 있다!


(심지어 그 멍청한 짐승까지도. 행렬의 꽁무니에 붙어 꽉 꽉 소리를 내며 열심히 따라오고 있다.)


나는 학자도 소설가 나부랭이도 아니고 그저 용병일 뿐이라 이걸 굳이 써야 하나 싶지만, 어차피 욜리판토 등 위에 멍청히 누워 있으면 할 짓도 없고, 뭐 상관없다. 욜리판토는 음, 이들이 타고 다니는 거대한 짐승의 이름인데, 기계가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다. 코가 길고 귀도 크다. 몸은 짙은 갈색이고, 키는 4m 정도 된다. 긴 이빨 두 개가 쭉 뻗어 있다. 신기하게도 코로 뭘 막 집는다. 물도 먹고. 아마 맞을 것이다. 양동이에 길게 뻗어서 죽 빨아들이는데 코가 움찔움찔 움직이는 걸 봤으니까. 


어쨌든,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설명하려면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이게 또 지랄 맞은 일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시계에 내장된 통역 소프트웨어를 돌려 보았지만 데이터베이스에도 없다고 한다. higo, bloiko, russula, 어쩌구, 저쩌구. 말이 통하지 않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손짓발짓으로 서로를 이해해야 했다.


이들은 –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상인이 아닌가 짐작할 따름이다. 생김새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피부가 갈색으로 그을려 있고, 눈은 밝은 노란빛이다. 황금빛에 가깝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길게 수염을 길렀고, 여자들은 머리를 길게 땋았다. 흰 천으로 된 옷을 주렁주렁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보니 엄청난 부자들이 아닌가 싶다. 밤에는 검은 천으로 된 외투를 뒤집어쓴다.


수는 대략 40명 가까이 된다. 애들도 있고, 늙은이도 있고, 부부(아마?)도 있고, 가족도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끊임없이 깔깔거리고, 애들은 계속해서 내 얼굴을 만지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애새끼들이. 짐승에도 겁대가리 없이 마구 기어오르는데 의외로 얌전히 군다. 


어, 또. 


나머지는 내일 해야겠다. 



21일차


욜리판토(트?)는 열 마리고, 널찍한 등에 네 명 정도가 먹고 자고 할 공간이 있다. 내가 타고 있는 놈은 행렬의 제일 끝에 있다. 작은 수송칸? 우주선? 같은 것 아래 넓적한 날이 달려 있고 욜리판트가 그걸 끌고 간다. 위엔 텐트나 가재도구 따위가 가득 실려 있는데, 모래 위에서 슥, 슥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나아간다. 아니, 끌려가는 거구나. 


욜리판토의 발은 넓적하고 발가락 사이에 얇은 막이 있어 모래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 이들은 낮에 움직이고 밤에는 욜리판토의 귀 아래서 – 이걸 길게 늘여서 잡아매면 천막처럼 되는데 – 불을 피우고 쉰다. 남자들, 여자들 가릴 것 없이 처음 보는 기다란 막대기를 입에 물고 있다. 끝에는 사발 같은 것이 달려 있는데 거기다 무슨 풀을 집어넣고 태우면 역겨운 냄새가 나면서 연기가 난다. 그걸 온종일 피우고만 있다. 


식사는 남자들이 준비한다. 욜리판트 똥을 모아다 – 솔직히 역겹다 – 그 위에 작은 냄비를 올리고 이것저것 처음 보는 풀이니 고기니 넣고 푹 끓인다. 맛은 좋다. 물도 어디서 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넉넉하다. 욜리판트들은 잘 먹지 않는다. 저만큼의 덩치를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할 텐데, 신기한 일이긴 하다.


어쨌든 말이 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는 이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전혀 모른다. 음식과 물을 계속 가져다주는 것을 보아 나쁜 놈들은 아닌 것 같지만, 혹시 모르지, 살을 찌워 잡아먹을지도. 여차하면 내 총도 있다. 총알은 아직 넉넉하다.



23일차


이들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중이다. 아직까지 알게 된 것은 타타 고렘 뿐이다. 이건 멈추라는 뜻이다. 


한 명, 행렬 중 가장 늙은 남자가 나를 불러 우리는 손짓발짓을 나눴다. 당연히 얘기는 잘 진척될 리가 없었다. 답답했는지, 그가 다른 두 명을 불러다 즉석에서 무언극을 시작했다. 휙, 넘어지고, 휙, 욜리판트를 세우고, 톡, 얼굴을 건드리고, 톡톡톡, 또 건드리고, 으쓱, 어깨를 올리고, 철벅! 하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쑥, 들어서 태우고, 아하, 내가 저렇게 구해졌구나. 


나도 열심히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손짓발짓으로 설명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 씨발, 그러니까. 이쪽, 응? 저쪽, 응? 짐승! 타고 갈게! 


으쓱.


지도, 지도 있어? 지도? 나는 열심히 땅바닥에 네모난 화면을 그린다. 거기에 이곳 저곳 점을 찍고, 열심히 욜리판트 무리도 그리고, 총을 든 내 모습도 한 마리 위에다 실어 놓았다.


아하! 하고 한 남자가 돌돌 말린 종이를 꺼낸다. 충격적이다. 어릴 적 그 책 말고 또 종이를 보게 되다니. 펼쳐 봤지만 읽을 수가 없다. 분명 어딘가의 지형을 묘사하긴 했을 텐데, 내가 어디 서 있는지도 뜨지 않고, 날씨 변화도 반영되지 않는다. 당연하지. 종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촉감이 좋아서, 나는 뜻도 모를 지도를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을’, ‘가까운’, ‘가다’ 이 세 단어를 어서 익혀야겠다.


조난 후 23일차다. 아직 상단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을 터다.


아니, 뭐, 다다랐을 수도 있고. 제발. 폭풍이나 만나라. 아니면 거대 도마뱀이든.


24일차


언어 배우기에는 도무지 진척이 없다. 나한테 그럴 머리가 있었으면 진작에 행성계 밖으로 날랐다. 그러지 못했으니까 입대해서 총이나 쐈지. 행렬은 어디론가 계속 이동 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나쁘지는 않다. 밥도 익숙해졌고, 간단하게나마 씻을 수도 있다. 물을 대체 어디서 구하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욜리펀트가 밤새 땅에 코를 박고 빨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똥구멍에서 물을 짜내려나. 아니기를 빈다. 


더 미스테리한 것은 이 사람들이다(적어도 외계인은 아닌 것 같으니까.) 마을에서 보았던 사람들과는 생김새도 언어도 생활도 다르다. 대체 어디에서 왔지? 어디로 가는 건가? 식량은, 물은, 돈은 어디서 구하는 걸까? 생활은 어떻게 하는 거고? 왜 생전 처음 보는 날 구하고 먹여 주는 걸까? 


어쨌든 간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욜리펀트의 흔들림에도, 아이들과 장난치는 일도, 간단히 음식 준비를 거드는 것도(그들은 내가 이름 모를 풀을 자르는 것을 허락하는 게 대단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그 입에 물고 연기를 뱉는 것만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아, 술도 있다. 과일로 담근 것 같은데, 알싸하지만 향긋한 풍미가 있고, 무엇보다도 엄청 독하다. 


무언가 계속 쓰면 언어 습득에 좀 도움이 될까 싶다. 아직 그래도 일주일 가량 남아 있으니까. 미련이 남은 것은 – 아냐, 미련이 남는다. 솔직히 말해서,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니까. 만약 늦지 않아서 어떻게든 따라붙는다면, 모르겠다. 오히려 입을 잘 털어서 되레 역정을 내면 보험금이라도(들진 않았지만) 조금 뜯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어떻게든 이놈들을 구슬려야 하는데. 


27일차

     

글렀다. 글렀어. 씨팔, 글렀어. 


며칠째 사막을 계속해서 가로지른다. 어둠이 내리고, 모래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면 부족 – 아마 가장 가까운 말이 아닐까 싶은데 – 은 모닥불 가에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열띤 토론을 벌인다. 두목은 오래된 가죽 물통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다. 일단 턱 끝에 몇 가닥 터럭이 난 것으로 보아서 남자인 것 같긴 한데, 우리 숙모도 담뱃불에 수염이 탔다고 불평하곤 했으니까, 확실치는 않다. 개 같은 년, 그 집으로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아. 위스키가 떨어졌다고 내 대가리에다 빈 병을 집어던졌으니까. 


술, 하니까 생각난 건데, 어제는 이 양반들이 식사 중에 나한테도 한 잔 주더라. 향긋한 과일 향기가 났지만 맛은 어마어마하게 독했다. 그게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악기 비슷한 걸 꺼내 켠다. 당기고, 밀고, 흩어지는 소리가 난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립고, 그리움에 잠기려는 찰나에 연기처럼 흩어져 머나먼 곳으로 번져 간다. 그러면 전에도 들었던 울리는 소리가 화답한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여튼, 밤이면 무슨 회의 같은 걸 한다. 모래바닥에다 열심히 길도 그리고 해도 그리고 방향만 보는 놈도 따로 있는데, 나는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다. 애초에 사막에 길이나 있느냔 말이다. 그 틈에 끼어들어서 나는 지난 사흘간 열심히 내 의견을 피력했다. 나, 군인, 나, 고용, 나, 돈 받아야 함. 손짓발짓으로(돈을 표현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이 사람들은 돈이 뭔지 모르나 보다). 나, 기계, 그래, 너, 멍청한 새끼야, 제발 내가 뭘 설명할 때만이라도 가만히 있어 주면 안 되겠니? 그러나 멍청한 기계는 올리펀트들의 마음에 쏙 들었는지 한가할 때가 없었다. 올리펀트들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코로 다양한 소리를 낸다. 그러면서 기계를 쓰다듬고 들어올리고 어르고 지랄들이었다. 염병할 쇳덩이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골골대며 엔진을 낮게 울렸다. 어쨌든. 


저 기계, 나 탄다, 그리고 행성 끝으로 간다, 가서 나 돈 받는다, 그리고 안녕, 당신들의 호의는 잊지 않겠어, 그러니까 좀.


그러나 이 사람들의 감정 표현은 도무지 알기 힘들다. 예, 아니오, 둘 다 고개를 가로젓는데 알 턱이 있나. 그나마 젊은 놈들하고는 말이 좀 통하지 않을까 싶어 옆에 끼어앉아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심각한 얼굴로 냄새나는 풀만 계속 태워댄다. 아니, 돌아버리겠네 진짜, 뭔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손님 말 좀 들어 줘, 손님은 왕이라잖아.


들은 척도 않는다. 회의는 꽤나 오래 계속된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뭐라고 서로 중얼대며 싸우는 걸 듣고만 있자니 아주 미칠 지경이다. 간신히 토론이 끝나면(나야 어딜 가도 무리 없이 속할 자신이 있는,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니까) 아까 그려 놓은 지도를 보며 – 솔직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나의 원래 목적지를 가리킨다. 제발 좀. 아직 안 늦었거든?


소용없다. 그래,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냐. 저리 가, 이 꼬맹이들아. 뭐가 좋다고 깔깔거려, 저리 꺼져. 가서 잠이나 자. 


난 애새끼들이 싫어. 개새끼들보다도 싫다. 뭐, 둘 다 짐승보다는 낫지만.



29일차

     

놀라운 것은, 빌어먹을 사막 한복판에 마을이 있다는 점이다. 믿어지는가? 마을이 있다! 물도 식량도 뭐 좆도 아무것도 없는 한복판에 마을이 있다. 점점이. 올리펀트들이 하늘 높이 코를 치켜세우고, 그러면 행렬 두목이 길게 나팔을 분다. 올리펀트들이 화답하면 우르르, 하고 지축을 울리며 몰려간다. 짜잔! 모래인들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아무짝에 쓸모도 없어 봬는 잡동사니들을 교환한다. 그러면 이, 음, 노란 눈들은(이제 이렇게 부르련다) 진지하게 흥정을 한다.


저 모래인들은 길을 알지도 몰라, 하고 내가 튀어나오려니까, 한번을 위협적인 행동을 한 적 없는 노란눈들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야, 왜 그러냐, 우리 밥도 같이 먹고, 응? 내가 니 아들 놀아도 주고, 올리펀트 똥도 치워 줬잖아? 진정해, 잠깐 얘기만 할 거야. 


안 된단다.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모가지에 칼이 겨눠지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시팔, 한따까리 해? 나 아직 총알 많이 남았거든?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길 자신도 없었을뿐더러, 만약 이긴다 해도 사막에서 어딜 가겠냐고. 염병할. 


염치불고하고, 나는 노란눈의 늙은이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제발, 나 좀 집에 보내 줘, 저 모래놈들은 길을 알 거야, 응? 


(자랑은 아니지만, 그 사이에 말을 몇 가지 배웠다. 바시에, 물, 이시엔, 음식, 프로이야, 여자, 마네, 남자, 킨토, 애새끼, 치가레테, 역겨운 풀, 타타 고렘, 멈춰, 나히테, 밤, 타크, 낮. 뭐, 이것저것.)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근엄하게 손을 들더니, 늙은이는 훌쩍 올리판토 등에서 뛰어 내려갔다. 높이가 꽤 될텐데, 아직 관절이 튼튼한가보지?


하릴없이 나는 올리펀트 등 위의 천막에서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얀 천이 기분 좋게 나부껴서 그새 잠이 들었나보다.


애새끼가 내 뺨을 때렸다. 아파, 이놈아.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치는 것을 보니 해가 떴나보다. 그러면 30일찬가. 좆됐네. 지금쯤 상단은 털 거 다 털었겠지? 내 돈, 내 돈, 군대 있을 때 한번 선임새끼 찌르고나 올 걸. 개 같은 새끼, 갑자기 우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야, 형님께서 지금 슬픔에 잠겨 계시잖아, 가만 좀 둬, 밥 아직 시간 남았잖아. 꼬맹아, 제발 좀, 응? 


꼬맹이는 그만두지 않았다.


나는 이래서 애새끼들이 싫어, 생각하고 있을 때, 다짜고짜 젊은 남자 세 명이 올리펀트 등 위로 솟구쳐 올랐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거람, 제트팩도, 보조 골격도 없는데. 그러고서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다짜고짜 내 팔을 끌고 뛰어내렸다. 야, 나는 니들이 아냐, 이 높이에서 사다리 없이는 죽어, 아닌가? 모래가 푹신하니까 괜찮나? 


결과적으로는 무사했지만.


     

30일차 아침

     

좋은 소식이다! 좋은 소식이야. 살이고 뼈고 죄다 파먹혀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옷으로 짐작하건대 이건 행렬의 상인이다! 뼈만 남은 모가지에 상인의 증표가 아직 달랑거리며 걸려 있다. 근처에 아직 행렬이 있을지도 몰라. 시체를 보니 꽤 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방향은 맞았단 소리 아냐? 이대로만 가면 아직 따라잡을 수가 있어. 흥분에 차 나는 달려갔다. 시체 주위에는 모든 부족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왜지? 이봐요, 나 좀 들여보내 줘, 나 얘 알거든? 아니, 사실 알진 못했고, 살아 있을 때 얼굴은 몇 번 봤어. 뭐, 지금 뒈졌다고 해도 상관이야 없지. 쓰러진 방향 보니 아마 저쪽에서 왔을 것 같은데, 식량하고 물 좀만 주면 나도 민폐 더 안 끼치고 갈 테니까, 신경 더 쓰지 말고, 하여튼 뭐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하하.


나를 끌고 뛰어내린 놈들은 아직도 내 안위가 걱정되었는지 팔을 세게 붙들고만 있었다. 응, 나 뼈 안 부러졌거든? 팔다리도 다 붙어 있으니까, 좀 놔 줄래? 아파, 씨팔놈들아. 


부족원들은 시체를 둘러싸고 서서 이 무리에 끼어들고 난 이후 처음 보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사방으로 고성이 오가며,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반가워 죽겠는데, 니들은 안 기쁘냐구.


해가 높이 떠오르고, 더 이상 추위를 견딜 수 없을 무렵에, 가죽 같은 노란 눈깔들의 늙은이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항상 짚고 다니던 지팡이로 내 배를 찔렀다. 아파요, 살살 좀 하쇼.


Woherkommstduundwasistdeinauftrag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뎁쇼.


Jagtihrden고래


뭐?


JAGTIHRDEN고래


고래라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나온 머나먼 행성인 지구의 말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아는 말을,

나는 용병 짓을 하다 좌초한 행성의 야만인 입에서 다시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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