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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Sep 02. 2019

어떤, 강한 사람에 대하여

1.


때는 2014년 - 여름방학, 나는 다크소울을 하고 있었다. 그당시 머리를 엄청나게 길러서 어깨까지 닿았었는데 우리 엄마는 그게 마음에 굉장히 안 들었는가 보다. 


아냐, 그건 이유 중 한가지였을 뿐일 테고. 그렇다 해도 매일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청소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여자들을 굉장히 존경한다. 길러 봐서 안다. 진짜, 더럽게도 귀찮다. 말리는 데만 한세월이니까.)


하여튼 그렇게 빈둥대고 있던 여름날에 우리 어머니 왈, 너 그럴거면 군대나 가라. 그럴까? 병무청에서는 매주 월요일마다 추가신청을 받는다(그러니까 대학교 수강신청같이). 엄마, 나 8일 뒤에 군대 오래. 


나는 사람이 접시를 떨어트리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다.


그렇게 긴 머리를 깎고(이발소 사장이 당혹스러워했었다) 나는 군대에 갔다. 


2.


훈련소 얘기는 생략한다. 그냥 전국팔도 오만 '병신과 머저리'들이 다 모여 있었다고 하자. 


자대를 가니, 대가리가 굉장히 크고 - 베레모 63호, 내가 56호였다 -  목소리가 좋은, 보통 인간보다 1.15배정도 큰 사람이 있었다. 


말이라는 동물이 있다. 네 다리에 발굽이 달리고 갈기가 있고 고대부터 인류가 운송이건 전쟁이건 식료품이건 이용해 왔던 불쌍한 동물인데,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이딴 사실이야 조금만 검색해 봐도 다 나오니까.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저런 사실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단 점이다. 그럼에도 내가 말을 실물로 처음 본 것은 초등학생 때였으나(이 때는 기억이 안 나니까 넘어가자) 고등학생 때에 보았던 말은 조금 컸다. 그러니까, 미묘하게 컸다. 1.15배 정도. 꼭 공룡 같아서 나는 미묘하지만 엄청나게 당황했다. 차라리 두 배 정도 컸으면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던, 동물도감에서 봤던 말보다 아주 - 아주, 미묘하게 컸으니까. 이 사람이 꼭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보아 왔던 인간들보다 위화감이 들 정도로 미묘하게 컸기에.


내 맞선임이라고 했다. 낮고 울림이 (지나칠 정도로) 큰 목소리로, '야, 너 담배 피냐?' 하고 묻길래, 핀다고 했다. 나는 원주에 있는(지금은 지작사로 통합되었지만) 1군사령부에 운이 좋아 예산과 행정병으로 들어갔는데, 사령부라는 말에서 짐작하셨겠다시피 굉장히 컸다. 그리고, 그 넓은 부지에 있는 모든 흡연구역에서 그는 나를 데리고 담배를 피웠다. 


3.


어찌저찌 군생활을 하다 보니 신병휴가를 나갈 때가 되었는데,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어마어마하게 흥분했다. 더할 나위 없이 흥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 전투화가 사라졌으니 내가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다들 짐작하시리라. 처음 든 생각은, X발 X됐다, 였다. 개새끼가 빠져가지고는, 자대배치된지 얼마나 됐다고 전투화를 잃어버려? 그것도 쌔끈한 구형 전투화였는데. 알고 보니 이 맞선임이 가져가서 열심히 닦고 있었다. '마, 후임이 신병휴가 나간다는데 맞선임이 전투화 정도는 불광내서 닦아줘야 되지 않겠나?'


다음날, 행정반에서 기쁜 마음으로 휴가보고를 하고 있을 때에, 그가 옆에서 도와 주며 다 끝날 무렵 봉투를 하나 주었다. '이게 뭡니까 XXX일병님?' 무서운 표정으로 '버스 타고 열어 봐라'고 했다. 


봉투 안에는 손편지와 함께 5만원이 들어 있었다.


그때가 2014년이었으니까 대충 이병 월급이 8만원에 일병 월급이 9만원 10만원 했을거다. 거기서 반을 준 거다. 꼴초가, 자기 담배 필 돈을 털어서. 


그 뒤로 군생활은 굉장히 편했다. 당연히 내가 잘해서였고, 지나치게 사람이 좋은 이 양반을 내가 저지한 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이건 그냥 하는 소리고. 그 사람에게 나는 여러번 구원받았다. 가끔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지나치게 세지만, 그럼에도. 노래방도 가고, 회식에서 술도 먹고, 간부한테 털리면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면서.


4.


무골호인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좋은 말은 아니다. 자기 줏대 없이 남들 비위만 맞추는 사람, 이라고 네이버 국어사전은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더 나은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줏대가 없는 것은 오히려 나니까. 감히 참새가 대붕의 뜻을 이해하겠는가? 와 같은 맥락이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내 깜냥으로, 좁아터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그를 무골호인이라 불렀을 따름이다. 대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도 넓고, 모든 것을 포용하며 웃어넘길 수가 있을까? 하고 나는 항상 궁금해했었다. 삼국지의 등장인물이라면 유비, 조조, 손권 급은 못 되더라도, 이름 남을 호걸이나 장수 자리 하나쯤은 꿰찼을거다, 라고 나는 항상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질투했던 것이다. 나는 저렇게, 육체의 강함은 물론이거니와 마음의 강함은 도무지 따라갈 자신이 없었기에. 호방함과 너그러움과 관용과 이해심을 배울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눈매도 사납고 표정도 사납고 성깔도 더럽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 개같지만 넘어가는 사람이었기에, 그토록 자신에게 충실한 원칙을 꿋꿋이 가슴속에 세우고 살아갈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5.


그럼에도 세상은 그렇게도 너그럽지도 않고 넓지도 않다. 줄담배를 피우며 술을 자주 마시는 그는 꺾여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도 모두를 끌어안으려 하는 모습은 처연하기까지 하다고 - 아니다, 처연하다는 말은 내가 할 말이 아니다 - 비장하다. 비장하다, 비장하다고밖에는. 


그는 여전히 투쟁한다.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강함에 걸맞는 의지 또한 가슴 속에 세우고 있다. 그가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을 잃기 전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그가 큰 물을 건넜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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