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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Sep 11. 2019

담양 기행 - 1

W와 Y와 함께

1.


언젠가 W의 고향인 담양에 가겠노라고 항상 다짐해 왔었는데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만, 지난주 마침 그가 내려가 있는 동안 Y형과 함께 담양에 가기로 했다. 1박 2일, 3시간 반, 300킬로미터. 체어맨을 타고 가는 길은 멀었다. 그전날, 술을 오래 마셨으나 맥주는 나를 배신했고 새벽 6시까지 뒤척거리다가 밤을 꼬박 새웠다. 동탄에서 커피 두 캔을 마시고 우리는 출발했다. 이사온지가 꽤 되었음에도 새벽의 공기는 처음 마셔 보았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이제 데뷔한지 40년이 넘어간, 전설적인 메탈 그룹으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옛 시점에서부터 나는 아버지 때문에 주다스를 들었었다. 아비투스를 깨부수려는 가열찬 노력 끝에 남은 것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이제 칠순이 다 되어가는 롭 핼포드에 대한 경의와 처연함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헤비메탈의 황금기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2.


담양에 도착하자마자 개구리 한 마리가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기겁해 소리를 지르는 내게 Y형은 '뭔데, 시발' 하고 덩달아 놀랐다.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은 흐렸고 바람이 거셌고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담양은, 2층건물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촌동네였고, 건물의 외벽에는 금이 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우뚝 서 있던 호텔에서 W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당신네 둘이 여기 와 있다니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던가. 


우리도 그랬다. 짐을 풀고 깼는지 자는지도 모르게 두 시간을 누워 있다, W부모님의 가게로 향했다.


3.



<영화루>. 혹시나 담양 갈 일이 있으면 참고하시기를. 아무리 아들 친구들이 왔다지만 끊임없이 음식이 나왔고 장정 셋이 배가 터져라 먹었음에도 끝이 없었음이라, 로마 귀족을 떠올리며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에 태어나 사치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어쨌든 맛만 보고 토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고량주의 뒷맛은 파인애플 같다. 류산슬에 깐풍기에 볶음밥에 뭐에,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토하고 다시 먹고 싶을 정도로.


배도 꺼트릴 겸 걸어서 죽녹원으로 향했다. 별 감상은 없다. 죽녹원 입구쯤에 가게가 하나 있는데 사람을 아주 잘 따르는 고양이 가족이 있다. 관방제림이라고 강을 따라 3-400년 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며 대나무 생맥주를 먹었다.


대나무, 대나무, 어딜 가나 대나무다. 대나무 밥, 대나무 술, 대나무 떡갈비, 심지어 대나무 한의원에 대나무 치과까지 있고, 온갖 조형물조차 대나무로 되어 있다. 죽녹원에서 죽창 얘기를 했다. 죽창은 구멍이 뚫려 있어 사람 몸에 찌르면 진공 상태가 되어 뺄 때 살점도 같이 뽑혀나온다.


끔찍하구만.


비가 오길래 지붕이 있는 3인승 전동자전거를 빌려 탔다. 담양은 좁아서 그것만 있어도 웬만한 곳은 죄다 볼 수 있더라. W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딱 하나, 면허가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달렸다. 자유!


4.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 7시인데도 해가 벌써 졌고, 우리는 용마루길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담양호를 둘러 산길을 따라 만든 산책로로, 높다란 다리가 물을 건너 산길로 우리를 이끌었다. 물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먼 데서 풀벌레와 새 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호기롭게 다리를 건너 산길을 따라 가던 세 사내는 곧 후회했다.


조명도 없이, 산에서는 불길한 벌레 우는 소리만이 들려왔고, 우리는 가다 말고 괜히 멈춰 방금 들린 소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둘이 가다 뒤에 따라오던 한 명 발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마침 죄다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졌길래 조명도 채 켤 수 없었고, 우리는 그저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끝없이 걸어갔다. 필사적인 농담따먹기도 마침내 소용없어져 우리는 공포 속에 걷고 또 걸었다. 산에서 멧돼지가 튀어나오면 어쩌지? 나뭇가지를 밟고 나는 호들갑을 떨었고, W는 불현듯 어깨에 얹힌 손에 기겁을 했고, Y형은 갑자기 황병기의 <미궁>을 틀었다. 정신병 걸릴 것 같은 노래.


마지막 쉼터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잠깐 쉬어가려는데 저멀리 수면 위로 시꺼먼, 무슨 여자의 머리통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야. 나는 낚시 자주 다니잖아. 좀 나이 있는 낚시꾼 아저씨들이 하는 말인데, 저런 게 보이면 일부러라도 눈 돌리래. 계속 보면 물귀신한테 끌려간다고.'


그 상황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소리였고, 우리는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며 크게 노래를 불렀다.


하늘이 도와 약도가 그려진 나무판을 보았을 때 우리는 이대로 갔다간 조난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꽤나 늦게 깨달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반딧불이가 있었고 우리는 때늦은 담력체험에 기묘해하면서도 뿌듯한 채로 서둘렀다. 높고 불안한 다리가 어찌나도 반갑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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