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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Sep 12. 2019

중학생과 락밴드

St.Gw를 그리워하며

1.


그해 여름, 체인은 1m에 2000원, 2m에 3000원이었다.


동네 철물점 아저씨는 중학생 꼬마가 대체 체인을 왜 사려는지 궁금해했지만 꼬마의 환한 미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체인이라 함은 펑크 락커가 할법한 패션용 사슬도 아니오, 어디 시골동네에서 출입금지 팻말과 함께 걸어 놓을 때나 쓸 무겁디무거운 통짜 사슬이었고, 나는 그것을 1m씩 두 번씩 떼다가 책가방에 하나를 넣고 하나는 교복 허리띠 춤에 쑤셔 넣었다. 일진도 아니오 그렇다고 대단할 것도 아니었던 꼬마는 의기양양하게 한쪽은 허리띠 고리에 끼우고 나머지 한 쪽은 블레이저 주머니에 쑤셔넣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어!' 따위의 생각을 하며. 2008년의 일이었다.


2.


그를 용인의 한 신도시, 동백이라는 동네의 중학교에서 처음 만났었다. 턱이 뾰족하고 코도 뾰족했다. 10년은 족히 지난 지금 대체 어쩌다 그와 친해졌던가, 따위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에미넴이었나? 건즈 앤 로지즈였나? 우리는 밴드를 만들었고, 어쨌든 그것이 중요했다. 어쩌다보니 그는 내가 지금 사는 또 하나의 신도시(신도시라는 말은 촌동네와 같은 말이라고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동탄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는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어, '야, 집이냐?' 하고 말한다. 짜증은 나지만 어쨌든 나는 대부분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를 만난다. 편의점에서 맥주 네 캔을 사서 우리는 강변에 앉는다. 애새끼 오줌줄기마냥 찔찔 흐르는 강이지만 강은 강이다, 밤에,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캔을 비운다.


3.


94년생인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가 커트 코베인의 환생이라고 믿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락스타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고, 멋진 삶을 살리라고 믿었다. 비록 그의 노래는 먼 산 까마귀가 목이 졸려 죽어가는 것과 다름없었고 내 기타는 간신히 오버드라이브와 디스토션을 구분할 정도였지만, 진지하게 우리는 메탈리카와 너바나, 주다스 프리스트와 위저, 린킨 파크와 트위스티드 시스터를 들으며 밤을 새워 토론하곤 했던 것이다.


베이스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고, 선생들이 눈치를 주면 달리 갈 곳이 없었던 우리는 한참을 걷고 또 걸어 동백성당 2층 성가대실에서 합주를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신성모독이다.


데뷔의 날은 곧 다가왔다. 밴드의 이름은 St.Gw였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유치하고 우습기 그지없지만(혹시나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Swear this Goddamn World'의 약자다) 네이버 지식인에 로고 만들어 줄 사람 없냐고 질문글도 올리고 했었다. 아무튼 제대로 된 밴드라면 로고는 다 있는 법이니까. 산 세리프 폰트의 메탈리카와, 굴림체의 산울림이 상상이 되는가? 어림도 없지. 아무리 음악이 좋더라도 로고가 글러먹었으면 아무짝에 소용없다.


4.


음악 선생은, 정말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음악 선생이었다. 키가 작고, 깐깐하고, 클래식을 좋아하고, 단정한 옷차림에, 회초리 대신 지휘봉을 들고 다니며 손바닥을 때리는. 히스테리 노처녀 따위의 별명으로 우리는 그녀를 칭하곤 했었다.


마침 여자 밴드 하나가 우리와 같이 공연을 하도록 잡혔다. 풋풋한 중학생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다들 상상하리리라. 방과후에 음악실에 모여 우리는 되도 않는, EQ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디스토션을 잔뜩 먹이고 찢어져라 되는 대로 일렉기타를 후려쳤다. 끔찍한 소음에 음악선생과 기술선생이 헐레벌떡 위층으로 뛰어올라와 우리를 혼냈다. '야, 바로 아래층에 교무회의중이야!'


그 뒤엔 피자를 사 주었던가.


5.


보컬은 고등학교에 가 이과였는데 수학을 조지고(4등급) 육사를 갔다. 항공병과, 지금은 헬기를 몬다. 치누크였는지, 아파치였는지. 베이스는 가톨릭 신부가 되었다. 그 무렵, 드럼과 내가 좋아했던 여자애는 그를 선택했는데 그가 신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굉장히 열받는 일이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복수의 의미로 나머지 멤버들은 그를 세워 두고 비비탄 총을 다리에다 쏴댔다. 베이스는 키가 굉장히 컸다.


6.


공연 날에, 우리 아버지가 강당에다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지나치게 출력이 큰 앰프를 실어다 놓았고, 리허설이 다가왔다. 가죽자켓, 아버지의 밴드 티셔츠 - 슬레이어, 아이언 메이든, 주다스 프리스트, 메탈리카 - 따위를 하나씩 입고, 드럼은 여자애들 밴드가 눈화장까지 해 주었다. 무대에 올라 서툰 솜씨로, 그렇지만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당장이라도 등재될 기세로 연주를 하고 있자니 앞서 말한 깐깐한 음악 선생이 팔짱을 끼고 우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희, 진짜 공연에서도 그따위로 할거야?' 그 말에 우리는 목뼈가 부러져라 빠져라 헤드뱅잉을 시작했다. 뛰고 돌고 부르짖고 기타 헤드로 심벌을 세게 때렸다(아빠는 비싼 기타가 함부로 다뤄진다는 생각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제서야 그녀는 흐뭇해했다. '이따 무대 서서도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곡은 단 두 곡이었다. 단 두 곡.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트위스티드 시스터즈의 'The price'. 무대에 오르기 전에 우리는 이미 작당을 했더랬다. '야, 선생들 말 들을 거야?'


마지막 곡은, 주다스 프리스트의 'Breaking the law'였다. 규칙을 깨 버려. 우리가 세븐 드래곤이라 불렀던 교장 도칠룡 선생의 얼굴이 새파래졌고, 우리를 통제할 책임이 있던 체육 선생과 기술 선생은 새하얗게 몸을 떨었지만 우리는 조또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학생이었고, 언젠가 락스타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7.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다. 이미 모두가 다 어른이 되어 버렸고, 우리보다 더 어른은 우리의 한탄을 보며 기가 차고 또 한심해하겠지만, 스물대여섯쯤 된 나는, 우리는, 그렇기에 더욱 어른이 되기 싫다.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기 때문에. 어린 놈의 새끼들이,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차라리 그 중학생 때로 멈춰 버렸으면, 하고 가끔 생각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재미도 없다. 한 놈은 군인이 되어 헬기를 몰고, 한 놈은 신부가 되어 기도문을 읊고, 한 놈은 집에서 글 나부랭이를 쓰며 백수 짓을 하고 있다.


8.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길을 건넜다. 개선장군처럼. 방금 월드 투어를 마친 락스타처럼.


'야, 악기 넣을까?'

'넣지마, 걍 메고 건너. 존나 간지나잖아.'


일렉기타와 베이스와 드럼스틱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우리는 길을 건넜다. 지나가는 차들은 우리를 쳐다보았다. 치킨집에 갔던 것 같다. 그때는 아직 맥주를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중학생이었으니까.


9.


돌이켜보면 무슨 싸구려 청춘소설 아니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지만, 즐거웠다. 기타를 치며 고백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저쪽 밴드 집에 놀러가 쏘우를(청소년관람불가다) 보기도 하고, 밤새워 문자를 하며 무슨 곡을 연주할지 토론하기도 하고, 아이팟에다 뮤비를 다운받아서 친구집에 놀러가 보기도 하며, 실력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퍼포먼스만 하루 왼종일 연습하기도 하고. 커크 헤밋과 제임스 헷필드 중 누가 기타를 더 잘 치냐고 싸우기도 했고, 중삐리는 진작 들어가 잘 시간에 동네를 헤메이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가 우리는 뿔뿔히 흩어지고, 대학에 가서 나는 밴드에 들어갔다. 그때는 담배도 피울 수 있었고 술도 마실 수 있었다. 다들 실력도 좋아 훨씬 어려운 곡도 연주할 수 있었고, 좁아터진 학교 강당이 아닌 제 돈 주고 비싼 클럽에서 빵빵한 설비와 음향시설과 조명 아래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많이도 했던 것 같다. 적어도 열 번은. 그런데도, 그 어떤 공연도 2008년의 강당보다 재미있지 않았다.


10.


대학에 들어간 이후 오랜만에 옛 멤버들을 만났는데, 그때와 달라진 점은 다들 담배를 피운다는 점과 술을 먹게 되었다는 점 말고는 나는 딱히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거기서 좀 더 지나, 방금, 대충 두 시간 전에, 보컬과 강가에서 맥주 네 캔을 사서 옛 이야기를 했다. 나이가 먹으니 눈물만 많아지네, 욕설과 담배 연기 사이에서 우리는 옛 이야기를 했다. 그는 오랜만의 연휴에 즐거워했고 나는 자소서를 쓸 걱정에 바빴다.


'야, 언제까지 그 시절만 그리워할 수는 없어.'


라고 헤어질 무렵에 그가 이야기했다.


맞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글은 그 시절로 자꾸만 되돌아간다.


슬픈 일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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