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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Mar 14. 2020

번역


나는 어렸을 때부터 번역가가 되고 싶었다. 번역의 다른 표현은 '말을 옮기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편의 세상과 문화와 세상과 일상을 이편의 세상과 문화와 언어로, 하나하나 말을 골라잡아 세심하게 골라 다듬는 것이다. 마치 와인을 고르는 것처럼. 나야 와인에 문외한이긴 하지만서도. 어쨌든, 그런 과정에는 일종의 즐거움과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쾌감이 있다. 해변에서 어여쁜 조개껍데기를 고르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정확하면서도 또 아름답게 어울리고 적합한 단어와 문장을 고를 수 있을까. 번역은 내 가장 큰 취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블로그도 계속 하지.


지금 번역 회사에서 일하면서, 나는 굳이 말하자면 꿈을 이뤘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저께인가, 꿈을 하나 꾸었다. 지루한 배경설명을 하나 하자면, 기술이란 것은 이미 - 이미가 아닌가? - 번역계에도 침투해 버리고 말았는데, 뭐 일하다 보면 나름대로 편리하기는 하다마는, 하여튼 번역 메모리라는 것이 있다. 영어로는 Translation Memory, 번역 메모리다. 100% 매치는 아예 일치하는 것이고, 101% 매치는 문맥까지 일치하는 것이다. 꿈에서 멤소스로 작업을 받았는데 전부 영롱한 초록빛의 101매치라 나는 신나게 Ctrl+Enter를 누르면서 컨펌을 했다. 아마 500워드(번역은 보통 워드 단위로 단가를 매긴다)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작업이 순식간에 완료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도 행복했다. 꿈을 깨고 출근할 때 나는 더없이 만족스럽고 또 행복했고 오랜만에 푹 잤다는 느낌이 들었다.


깨고 나니까 얼척이 조금 없더라. 겨우 이딴 걸로 행복해지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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