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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steuryouth Dec 19. 2022

모래성처럼 휩쓸리는, <아사코>

불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사랑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불안. 매일 그 불안 속에서 살아가다 한 번, 딱 한 번 상대가 실수를 저지른다면 믿음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믿음만 무너지는 게 아니다. 삶도 무너져버린다. 평생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아사코는 사진전에서 만난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바쿠는 별난 구석이 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그런 바쿠는 어느 날 신발을 사러 간다며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아사코는 도쿄로 이사한 후 카페에서 일하는 중이다. 매일 커피를 배달하는 회사에서 바쿠와 똑같이 생긴 남자를 만난다. 료헤이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바쿠라고 착각한다. 줄곧 료헤이를 피했던 아사코는 료헤이의 도움을 받아 입장이 불가한 시간에 사진전을 관람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서로 친해진 료헤이와 아사코는 사귀게 된다.  


료헤이가 프로포즈 하던 날, 아사코는 바쿠와 사귀었던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료헤이는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2년 전 직장 동료가 닮았다고 해서 바쿠의 사진을 봤고 그래서 아사코가 피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이상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아사코가 지금 사랑하는 건 료헤이니까 괜찮다고 했다.


5년을 탈없이 만나던 중 아사코는 바쿠를 만나게 된다. 갑자기 떠나버린 바쿠는 유명한 모델이 되어 돌아왔다. 늦을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한다. 아사코는 료헤이 대신 바쿠를 선택한다. 바쿠와 함께 떠나던 중 아사코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료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쿠에게서 떠난다.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불안에 떨며 2년을 보냈다. 언제 바쿠가 찾아올 지, 아사코가 바쿠와 함께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벌어졌다. 아사코는 바쿠와 함께 떠났다. 오사카에서 함께 살기로 했는데, 평생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떠났다. 아사코는 그렇게 오사카로 이사하기 전날에 떠났다. 


아사코에 대한 료헤이의 믿음은 사라졌다.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언제 떠날 지 몰라 불안했는데 진짜로 떠나버렸다. 돌아온다 한들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아사코는 결국 료헤이에게 돌아왔다. 료헤이는 아사코를 평생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5년을 공들여 쌓아온 믿음이 무너졌다. 다시 세우기엔 너무 많은 힘과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아사코의 몫이다. 료헤이가 짊어져야 할 것이 아니다. 어쩌면 료헤이와 아사코가 함께 살아가는 내내 믿지 못할 수도 있다. 아사코는 그래도 괜찮다고 한다. 료헤이를 너무나 많이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한다. 료헤이는 아사코에 대한 믿음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아사코는 그만한 노력을 할 수 있을까. 


료헤이는 억울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 애인이 나와 똑같이 생겼다.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그가 전 애인을 아직 잊지 못한 것 같았다. 전 애인은 유명인이 되었다. 마주치지는 않더라도 TV에 나온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TV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아사코의 마음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와 닮았다는 이유로, 하필 그 사람이 내 애인의 전 애인이라는 이유로, 게다가 그가 잘나가는 모델이라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불안에 떨어야 했다. 실제로 아사코가 떠났다. 믿음도 무너졌고 억울함도 있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이유도 아니다. 전 애인이 나와 닮았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가 유명해서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것, 5년 전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굉장히 불안해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그러다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억울함도 있을 것이다. 분명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정도로 사랑한다. 그런데 불안하다. 사랑하는 마음은 너무 크지만 그만한 믿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거슬리는 게 있다. 내 마음 대로 없애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별일 없으면 항상 존재할 것이고 내가 불안에 떨지 않으려면 상대가 나에게 강한 믿음을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믿음을 줘!’라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나는 믿음을 잔뜩 주고 있는 걸!’이라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웃긴 일이다. 마음이라는 게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같이 살기로 결심한다. 행복한 날을 꿈꾼다.


행복한 날을 꿈꾸던 중에 날벼락을 맞는다. 거슬리던 게 화로 번진다. 무너져버린다. 삶이 무너져버린다. 모든 게 다 무너져버린다. 이삿짐 정리도 하지 못한다. 삶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새 삶을 시작하려 떠나온 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끝나버린 것 같다.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언제 사라지는 건지 알 수 없다. 오랫동안 견고하게 쌓아온 사랑에서 오는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지점은 모른다. 그 지점을 정확히 안다면 다룰 줄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불안에 떨 일도 없을 거고 행복한 일만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니 정확하게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 마음이 마음 먹은 대로 된다면 사랑하는 게 얼마나 편할까. 불안에 떨 일도, 상처 받아 아파할 일도, 다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사랑 앞에서, 믿음 앞에서 무너진다. 내 마음을 내 마음 대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상처 따위 받지 않고 불안해하지도 않아.’라고 말해도 상처 받고 불안해하는 게 인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믿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은 지속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랑이 지속 가능한 일이 되려면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며 믿음이 강하게 존재해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사랑은 휘발되고 말 것이다. 아사코가 바쿠의 손을 잡고 식당을 나가버린 것처럼 끝날 것이다. 물론 료헤이는 다시 아사코를 받아준다. 그렇지만 둘의 관계가 영원히 이어질 거란 확신은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과 그걸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서는 반드시 균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쳐버린 아사코가 떠날지, 끝까지 믿지 못하게 되는 료헤이가 떠날지는 알 수 없지만 둘 사이에는 언젠가 문제가 생길 것이다. 곰팡이는 지운다고 완전히 제거되는 게 아니다. 언젠가 분명 다시 곰팡이는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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