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문신과 유사하다. 지우거나 덮어도 마음에 남는다. 문신을 처음 새길 때의 기억은 정확하게 남아 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잊으려 발버둥치는 것이다. 원하는 도안을 골라 몸에 새기는 것, 지우거나 다른 것으로 덮는 것,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래지는 것까지 모두 사랑과 닮아 있다. 윤희의 마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하나 있다. 색은 바랬지만 쳐다볼수록 선명해지는 것. 윤희의 마음에는 색이 거의 다 빠진 문신이 있다.
윤희의 딸 새봄은 어느 날 윤희에게 온 편지를 읽는다. 오래된 친구에게서 온 것이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편지다. 편지를 읽은 새봄은 편지의 존재를 숨긴 채 윤희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윤희는 여행지에 대한 옛 기억이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린다. 윤희의 과거 연인은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삿포로에 도착한 윤희와 새봄은 오전에 각자 여행하고 오후에 동행하기로 한다. 새봄은 윤희와 윤희의 옛 연인 쥰을 만나게 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윤희는 쥰의 자취를 따라 여행한다. 새봄의 계획은 결국 성공한다. 윤희와 쥰은 20여년 만에 재회한다.
윤희가 쥰을 다시 만나서 흘린 눈물과 입가의 미소는 당연하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 20여년 만에 다시 만나는데 눈물이 안 날 수가 없다. 윤희는 쥰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말한다. 부모님에게 쥰을 사랑한다고 말했더니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고 억지로 정신 병원에 가야 했다고, 게다가 억지로 오빠가 소개해준 사람과 결혼해야 했다고 말한다. 남편과 이혼하고 힘들게 살았던 건 쥰을 떠난 것에 대한 벌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살아왔다고 한다. 편지의 끝에서 윤희는 말한다. 둘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더이상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언젠가 새봄에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더불어 용기 내고 싶다고 한다. 아마도 윤희는 삿포로에서 쥰을 만나고 큰 용기를 얻은 것 같다.
예전에 즐겨 들었던 오래된 노래가 있다. 우연한 기회로 오랜만에 다시 들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즐겨 듣던 때의 느낌이 아니다. 그 노래를 즐겨 들었을 때는 노래를, 노래 자체를 느끼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 다시 들을 때에는 그때의 기억을 긁어낸다. 노래를 듣던 때의 내 처지를 떠올린다. 그때 내가 뭘 했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 따위의 것들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는다. 그 노래가 전 애인과 함께 자주 들었던 노래라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쓰린 기억이 떠오를 테니 말이다. 노래를 들으며 지난 일을 떠올리다 보면 웃을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추억이란 건 그런 것이다. 눈물을 흘리게 만들거나 웃게 만드는 것.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옛사랑을 떠올리면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쥰의 집을 몰래 찾아 갔을 때 윤희는 쥰이 나오는 걸 보고 숨는다. 윤희는 아마도 쥰을 떠났을 때의 생각이 나서 숨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쥰을 떠났을 때 생각이 나서 쥰 앞에 서지 못한 것이다. 윤희에게 쥰은 잊지 못할 기억이다. 엄청나게 아픈 기억이다. 윤희는 그 기억이 떠올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숨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누구도 손가락질 할 수 없다. 억지로 떠나야 했던 윤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숨었다고 해서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윤희에게 쥰은 오래된 노래와 같다. 잊고 살았다가 어느 날 마주한 그런 오래된 노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노래.
윤희는 쥰을 사랑했다. 쥰도 윤희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만남을 지속할 수 없었다. 세상이 그 둘을 갈라놓았다. 둘의 관계를 모두에게 부정당하고 정신 병원에 다녀야 했으며 억지로 결혼해야 했다. 그러다 새봄을 낳았다. 윤희는 새봄만 보며 살았다. 윤희가 살아내고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새봄이다. 쥰도 없는 상황에 새봄 마저 없었다면 윤희는 살아갈 힘이 없었을 것이다. 새봄은 윤희에게 살아갈 힘을 준 동시에 용기도 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윤희와 쥰이 만날 수 있었던 건 모두 새봄 덕분이다. 새봄 없이 윤희와 쥰은 기쁨과 추억의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온 세상이 그 둘을 갈라놓아도 새봄은 그렇지 않았다. 새봄은 궁금해했고, 찾아갔다. 그리고 윤희와 쥰을 만나게 했다. 새봄은 윤희에게 든든한 동반자다. 윤희에게 살아갈 힘이 되었으며 용기를 주었다. 새봄에게 사랑은 그저 사랑이다. 마음만 가득하다면 그걸로 된다. 그렇기에 둘을 만나게 할 계획을 짰다. 새봄은 윤희에게 둘도 없는 친구다.
윤희의 사랑은 모두에게 부정당했다. 가족 마저 윤희를 내쳤다. 윤희의 가족은 윤희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을 사랑이라 하지 않고 정신병으로 치부했다. 정의할 수 없는 걸 정의해서 그에 반하는 것들은 모두 정신병이라 치부한다. 비단 윤희의 가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랑은 정의할 수도 없고 형태도 다양하다. 윤희는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 나의 사랑을 모두가 부정하는 일, 감당하기 쉽지 않다.
사랑은 특정한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이것만이 사랑이고 그 외의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것도 사랑이고 저것도 사랑이다. 사랑은 한 가지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무형에 가깝다. 그 모양이 너무나 다양해서, 수천, 수만 가지로 번질 수 있어서 무형이다. 그런 사랑을 하나로 정의해서 나머지를 모두 부정하는 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세상엔 그렇게 상처 받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너무나 많지만 보듬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상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부정당한 옛사랑을 오랜만에 마주하는 건 특별한 일이다. 온 세상이 내 사랑을 등졌어도 내 마음에는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된 노래를 들었을 때처럼 그때의 기억을 긁어낸다. 마음이 요동친다.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용기 내서 다가갈지, 뒤로 숨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분명 눈물이 날 것이다. 기쁨과 슬픔이 섞인 눈물이 흐를 것이다. 무엇이 더 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기쁘고 슬플 것이다. 옛사랑이란 그렇다.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일이다.
낡은 테이프 속에는 온갖 추억이 담겨 있다. 언제든지 꺼낼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꺼내지 않는다. 어떤 감정이 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좋은 추억만 떠오를지, 나쁜 기억만 떠오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구석에 가져다 놓고 눈으로 구경만 한다. 굳이 꺼내서 재생하지 않는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 이러나 저러나 눈물이 터질 것이다. 과거의 일들이란 대개 그렇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되짚는 게 힘들다. 당시의 내 삶이 너무 영화 같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영화 한 편을 다시 보는 기분이 들 것만 같다. 그래서 쉽지 않다. 다시 눈물을 흘려야 하니까. 다시 그때의 감정이 스며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