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
아직 대선후보이던 시절 트럼프에 대해 사기꾼이라 언급했던 걸 제외하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이하 긴즈버그 또는 RBG)의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이 말일 거다.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나 있어야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9명 중 9명’ 이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죠. 전원이 남성일 때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는 세 가지 이야기 축으로 진행되는 다큐멘터리다. 첫 번째는 미국 연방 대법원 구성원 가운데 진보 성향에서 소수 의견을 대변해온 그가 어떻게 ‘노토리어스 RBG’라는 별명을 얻으며 인터넷 밈이자 밀레니얼들의 아이콘이 되었는가 하는 팬덤의 현상이다.
두 번째는 이 인물의 성장, 그리고 커리어 패스를 쌓아온 과정이다. 유대계 이민자 집안에서 자라나 500명 정원 중 여학생이 9명 밖에 안 될 때 하버드 로스쿨 로리뷰 편집부 활동을 할 정도로 뛰어났던 긴즈버그도 어김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양한 차별을 겪는다.
세 번째가 가장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변호인 혹은 판사로서 개입해온 성차별 소송의 케이스들이다. RBG는 남성 동료들과 달리 주거비용 지원을 받지 못하던 여성 공군, 남성 주양육자라는 이유로 보육제도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싱글 대드, 여성이라는 이유로 군사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여학생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남성 중심적 사법 시스템을 서서히 설득하고 바꿔간다.
영화 초반에 카메라는 워싱턴 DC의 풍경을 스쳐가며 담는다. 건국 영웅의 동상, 의회, 연방정부 법원, 백악관 등 정치와 역사의 상징적 장소들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공간이다. 1993년,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여성으로서는 역사상 두 번째였다) 긴즈버그가 취임사를 할 때, 그에 대한 나쁜 평가의 코멘트들이 이어진다. ‘헌법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마녀’ ‘대법원의 수치’ ‘사악한 괴물’...
흥미로운 점은 뒤이은 주변인들의 인터뷰, 그리고 학창시절부터의 자료화면으로 재구성되는 긴즈버그의 인품이 상당히 차분하고 온화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험에 의거한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된다. 여성이 뭔가 강하게 주장할 때, 그리고 그 주장이 자신과 다른 의견일 때 세상은 그를 쉽게 악녀로 몰아간다.
긴즈버그가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 말하는 남편 마티는 진지하고 내성적인 RGB와는 정반대의 유머감각과 사교성, 요리 실력으로 아내의 커리어를 뒷바라지한다. 긴즈버그는 1950년대 코넬 대학에서조차 여성들이 총명함을 숨기고 지냈다고 회상한다. “마티는 나에게 뇌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준 남자였어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는 남자기 때문에 여자의 똑똑함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죠.”
어떤 집단이건 여성이 30%만 넘기면 ‘여초현상’ 식의 표현이 종종 나오는 한국에서는 지금 대법관 14명 중 3명, 헌법재판관 9명 중 3명이 여성이다. RGB가 속한 미국 연방 대법원 역시 지금은 오바마가 임명한 두 명의 여성대법관까지 모두 세명이 일하고 있다.
어느 나라건 ‘헌정 역사상 최고의 여풍’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서, 정원의 1/3 정도를 최대의 여성 머릿수로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로스쿨 제도 도입 전, 판사 신규 임용을 사법연수원 성적순으로 했을 때는 신규 판사 임용에서 여성 비율이 87.5%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커리어 출발 시점의 똑똑한 젊은 여성들은 어디론가 쉽게 사라지고 고위 임명직은 30%가 최선인 현실 속에서 ‘9명 중 9명’ 은 여전히 먼 미래,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더욱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할 이상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지금 볼래요?
황선우 / 작가
에디터, 작가, 운동애호가입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썼고요,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