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2005)
오래전 영화 속에서 본 문구.
스티커 붙이는 센스가
인생의 센스이기도 한 거다
살면서 가끔 스티커를 붙일 때마다 저 문구가 떠올랐다.
어릴 때는 핸드폰 케이스, 가방, 노트북에 스티커를 붙이다가 이제는 프로그램 홍보, 문콕 금지 등등 다양한 스티커를 붙이곤 한다. 나는 참 스티커를 붙이는 센스가 없었다.
핸드폰 케이스에도 노트북에도 한껏 멋을 낸다고 스티커를 붙이긴 붙었는데 뭔가 어설펐다. 지나치게 많이 붙여서 멋이 떨어지거나 몇 개 붙이지 않아도 촌스러운 것만 골라 붙여 놓은 적이 많았다.
홍보 스티커나 문콕 금지 스티커는 각도와 위치가 아주 묘하게 별로였다. 붙이고 나면 위치가 눈에 덜 띄어서 아쉽거나 각도가 약간 비뚤어져서 마음에 딱 들지 않았다.
스티커를 붙이는 센스는 경험과 비례해 늘지 않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붙이고 나면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어쩌면 저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스티커 붙이는 센스가 없듯이 인생에도 나는 그닥 센스가 없는 것 같아서.
스즈메는 나처럼 스티커 붙이는 센스가 없는 사람이다. 친구인 핵인싸 쿠자쿠가 가방에 멋지게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동안 스즈메는 누가 봐도 촌스럽게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 매일 거북이에게 먹이를 주는 게 주된 일상인 그녀는 자신이 평범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존재가 안보이나요?
스즈메는 이러다 자기 존재가 진짜 사라질 것만 같다. 그러다 어느 날 계단에 붙어있던 손톱만한 스파이 모집 공고를 보고 스파이 시험에 합격한다. 스파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가능한 평범하게 살기’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해야 하는 것이 스파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그런 스파이의 자질에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한 스즈메가 딱이라는 것. 스파이가 돼서 기쁜 것도 잠시, 스즈메는 고민에 빠진다.
평범하게 산다는 게 뭘까?
새로 스파이가 된 스즈메에게 평범하게 살기 위한 지령을 오는데, 그 지령의 내용이 황당하다. 식당에서 튀지 않게, 종업원이 자신이 뭘 시켰는지 알아채지 못하게 평범한 메뉴를 고를 것. 3만원으로 가장 평범하게 장을 볼 것. 이벤트에 절대 당첨되지 않을 것.
어떻게 보면 참 쉬운, 항상 하던 대로 하면 될 일이지만 막상 저 원칙을 지키려고 하다 보니 평범하게 산다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네에서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어중간한 맛을 내는 라면을 팔던 아저씨도 알고 보면 스파이였는데.
맛있게 만드는 건 간단하지만,
어쩌다 들렀을
어쩌다 먹는 맛을 내는 건
더 어렵다
라면을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지만 어중간한 맛을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라면집 아저씨. 평범하게 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즈메는 거북이에게 먹이를 주는 반복되는 일상도 더 이상 지겹지가 않다.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하지만 점점 ‘평범’이라는 기준을 잘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뉴스에 놀랄 때 마다 “원래 남자들은 (혹은 여자들은) 다 그래” “요즘 안 그런 사람 어딨나” 이런 말을 듣는다.
원래 다 그런 거라고, 사람들 다 그렇게 살지 않냐고 ‘평범’을 얘기하면서 또 어떤 때는 ‘평범’의 기준이 달라진다. “그냥 넘어가자. 대충해. 꼭 튀어야겠니?”
평범의 기준에 따라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남들만큼’ ‘남들처럼’ 사는 게 평범함이라고 하게 되면 남들이 이상하게 살면 나도 이상하게 살아야 하는 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평범한 삶’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라면 하나를 끓여도 각자 맛이 미세하게 다르고 스티커 하나를 붙여도 위치와 모양과 각도가 하나하나 다르듯이 ‘평범’으로 뭉뚱그려지기가 힘들다.
각자는 각자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매일 같이 거북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 무료하게 느껴지다가도 스파이가 된 후부턴 중요한 ‘평범하기’ 임무가 되듯 남들의 평온해 보이는 일상도 무슨 사정이 있을지 모를 일이니 단정지어선 안 된다.
스티커를 붙이는 센스가 없는 나와 스즈메 같은 사람들은 그것대로 촌스러운, 어설픈, 뭔가 부족한 그런 스타일을 갖고 있는 셈이다. 스티커를 잘 붙이는 센스 있는 사람들은 절대 따라할 수 없을테니 나는 나답게 인생의 센스가 부족한 대로 인싸들을 조금만 부러워하면서 잘 살아보자.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최유빈 / KBS 라디오 PD
매일 음악을 듣는게 일 입니다. 0시부터 2시까지 심야 라디오 '설레는 밤 이혜성입니다'를 연출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