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 (2019)
어떤 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고 누군가의 얼굴은 흐릿하게 지워짐으로써 더 정확히 지시할 수 있다. 영화 <윤희에게>(2019)에서 달의 형태가 여러 번 바뀐 뒤에야 보름달이 되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영화에서 그 만월까지의 시간은 아픈 윤희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 된다.
<윤희에게>는 10대 시절 서로 사랑했던 윤희와 쥰이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 어렵게 재회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여러 면에서 깊은 시선과 절제를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이들의 사랑에 가해졌던 폭력과 상처에 대해 다루면서도 그 중핵이나 다름없는 지점을 바로 가리키지 않고 그것의 주변부를 통해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둘의 재회가 가능해지는 시작점도 그러하다. 윤희에게 편지를 쓰지만 보내지는 못하는 쥰을 대신해, 쥰이 어른이 되도록 돌봐준 고모가 용기를 내어 부쳐버리는 데서 사건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전달될지 알 수 없고, 받더라도 회신이 올지 알 수 없는 편지.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달을 보며 비는 소원처럼 가장 순정하고 정직한 욕망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윤희의 딸, 새봄이 이 불가능할 듯한 재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천진하고 당돌한 계획을 세우면서 오직 꿈속에서만 가능했던 둘의 만남은 현실의 장으로 나오게 된다.
윤희는 쥰과의 사랑 때문에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히고, 쥰은 가족의 사정에 따라 한국을 영영 떠나야 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새롭게 만들어낸 또다른 가족들의 응원 속에 다른 결말을 써볼 용기를 가지게 된다는 것. 이러한 과정에, 한국사회의 여성과 소수자 그리고 가부장제가 어떤 갱신을 거치며 변화해오고 있는지가 담긴다. 사랑의 문제가 사랑 이외의 모든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것이다.
윤희는 오빠의 강권으로 이성과 결혼생활을 하고 새봄을 낳지만 이혼을 한다. 전남편은 무섭게도―그러나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자신을 냉랭하게 대하고 외롭게 만든 윤희를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전남편의 소식을 듣고 윤희가 문득 환하게 얼굴을 펴며 잘되었다고 기뻐하기 때문이다. 윤희는 그 사랑의 선언이 인쇄된 청첩장을, 어쩌면 자기도 쥰과 함께 적고 싶었을 인사말들을 아주 소중하고 고운 것을 대하듯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런 윤희를 바라보며 남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누군가를 망가뜨리게 되는 비극, 의도하지 않았어도 결국에는 매순간 누군가를 파괴하고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을 그의 삶은, 사랑에 있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강한 억압으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 했을 때 누구도 그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윤희는 그런 그를 향해 울지 말라고, 울 필요는 없다고 얘기한다.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평생을 타인에 의해, 후에는 스스로 벌을 받듯 살아야 했던 윤희가 그렇게 말할 때 얼굴에는 아주 분명한 위엄 같은 것이 서린다. 바로 그것이 그 고통의 시간 동안 윤희가 꿈꾸어왔을 완전한 사랑의 형태에 대해 알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마치 달처럼 누구에게나 당연히 공유되어있고 변함없이 환하며, 구름으로 가려진다고 그것이 없다고 선언하지 않고 여전히 거기 있다고 지시하는 일이라는 걸.
<윤희에게>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다름 아닌 “윤희에게”라는 문장이다. 어떤 말이 적힐지 알 수 없어도 그렇게 수신처를 정하고 뒷말을 이어보기 위해 긴 시간을 돌아볼 누군가를 상상하는 건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고 오히려 외로워지는 일이다.
어쩌면 영화에서와 달리 그것이 막막한 현실을 건너 가닿는 일이란 드물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진심을 전할 결심을 하고 우리가 어딘가에 앉아 그 대상을 반복해서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자체도 어떤 가능성이 아닐까.
사랑과 사랑 밖의 모든 말의 수신처인 각자의 “윤희에게”가 있다는 것, 그래서 오늘도 내가 이렇게 최선을 다해 당신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김금희 / 소설가
작가가 된 이후로는 마감들을 처리하느라 정작 영화를 전처럼 보지 못하는 소설가입니다. 그 아쉬움을 달래는 방법으로 또 마감을 만들어내고 말았죠. 최근작으로 『너무 한낮의 연애』,『경애의 마음』 등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