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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May 08. 2020

집에서 얻는 치유의 쉼표

인생 후르츠(2016)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2020년 봄은 참 이상한 계절로 기억될 것 같다. 매일이 구분되지 않기에 시간이 희미하게 흐른다. 프리랜서인 나는 워낙에도 재택근무를 하는 일이 많았지만 외부와의 접촉은 더 줄었다. 정기적으로 만나던 친구들과의 모임은 멈췄고, 준비 중이던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일의 공백을 틈타 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계획했던 일들을 실행하기 어려워진 건 물론이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게 불가능하다. 요즘의 최선은 기왕 집에 머무르는 동안 끼니를 정성껏 챙겨먹고 미뤄둔 대청소를 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당근마켓으로 택배거래 해 푼돈을 버는 일 정도다. 


트위터에서 누군가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동안 우리는 은퇴 이후 노년의 삶을 미리 경험하고 있다’고 쓴 걸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공감하게 된다. 거주지 인근의 좁은 반경을 벗어나지 않으며,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순위에 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생활 속에도 작은 즐거움들은 있다. 사람이 드문 곳을 골라 평일 낮 시간에 마스크를 낀 채로 하는 산책, 마음도 시간도 여유가 없어 못 들춰보던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몰아보는 일,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악기 연습 같은 것들 말이다.    



<인생 후르츠>는 느릿하게 흐르는 노부부의 사계절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87세의 할머니와 90세의 할아버지, 둘이 합쳐 177세인 부부는 40년 된 단층주택에 산다. 방 한칸에 15평짜리 좁은 집 주변으로는 울창한 나무들과 텃밭이 둘러싸고 있다. 등이 굽고 동작이 굼뜬 노인들이지만 누구에게 맡기지 않고 시간을 들여 집을 돌본다. 계절이 바뀔 때면 문풍지 종이를 새로 붙이고, 감자나 죽순을 캐다가 음식을 만든다. 마당 한켠에서는 아궁이에 불을 때 베이컨을 훈제하며, 테라스에 매단 발 안에서는 전갱이와 매실을 말린다. “이 방향으로 놓으면 마당의 꽃이 보이니까.” 거실의 테이블을 움직이면서 마당의 화초를 차경해오는 장면처럼 이들의 삶은 자연과 만나 확장된다.  


마당에서 난 초귤을 뿌린 장어구이, 역시나 뜰의 나무에서 따다가 만든 복숭아조림과 체리잼을 올린 요구르트, 간장경단, 푸딩... 히데코 할머니의 능숙한 부엌 살림과 풍성한 식탁을 보는 일은 <리틀 포레스트>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통씩 엽서를 쓰고 그림을 그려 우체국에 부치러 간다. “만나지 않고 편지로만 이어진 친구들이 많아요.” SNS 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코로나 시대의 젊은이들과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부부의 이런 슬로우 라이프스타일이 시작된 계기다. 츠바타 슈이치 씨는 젊은 시절 아이치현 고조지 주택공사에서 뉴타운 설계에 참여한 건축가였다. 산 중턱의 자연 지형을 보존하며 공동주택을 짓겠다던 그의 계획은 경제성과 효율의 논리에 밀려 무산되고, 산도 계곡도 깎아버린 자리에 대규모 고밀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이런 경험 이후 츠바타 부부가 선택한 삶이 바로 영화 속에 나오는 집에서의 생활이다. ‘집마다 작게라도 숲을 만들면 모두가 커다란 숲 속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츠바타 씨의 철학이 자기 자신의 생활에서나마 관철된 셈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영화 속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차근차근 천천히 흐르는 배우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은 타박타박 발밑을 디디며 걷는 노인의 걸음걸이 같다. 자연의 섭리를 풀어 이야기하는 내용을 듣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적응해온 도시 속 미친 삶의 속도를 돌아보게 된다. 


코로나 19로 인한 잠시멈춤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팬데믹이 지나간 후 무엇이 ‘뉴 노멀’이 될지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컨테이젼>처럼 본격적으로 전염병을 다룬 영화, <이어즈 앤 이어즈>처럼 디스토피아의 근미래를 꼬집는 통렬한 시리즈도 지금의 상황 속에 우리에게 통찰을 주지만 <인생 후르츠>를 보면서 얻는 치유와 쉼표도 결코 가볍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다시 여럿이 모여앉아 음식을 나눠 먹는 일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집 안에서 어떻게 휴식과 재생을 도모할지 더 궁리하고 정성을 쏟아본다. 츠바타 부부가 보여주는 것처럼,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인생 후르츠>, 지금 볼래요?


황선우 / 작가


에디터, 작가, 운동애호가입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썼고요,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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