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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May 12. 2020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5월의 그곳

택시운전사(2017)

잘 알려졌듯 영화 <택시운전사>는 당시 광주의 소식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극중 피터)와 그를 태워 광주로 간 택시 운전사 김사복(극중 김만섭)을 통해 광주 항쟁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어떤 자료로도 그날의 끔찍함을 다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영화는 특히나 더 그렇다. 현실의 무게감을 그대로 가져가자면 관객이 느낄 고통이 너무 크고 조금이라도 중심을 잃는다면 희생자들의 고통을 가벼이 여기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만큼 실제 이야기와 영화적 요소들의 균형이 잘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영화 <택시운전사>는 흥행만큼 각 장면의 실화 여부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실화 검증 작업을 하다 보면 영화를 위해 만든 장면보다 당시의 현실이 더 영화 같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영화 후반부, 주인공의 택시를 추격하는 군인 차량에 맞서 광주의 택시 운전사들이 주인공의 택시를 보호하는 장면은 너무 작위적이라는 평이 많았다.



그럼 이런 장면을 넣었다면 어땠을까? 광주 시내의 택시 기사들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금남로로 모인다. 200여 대의 택시를 시작으로  버스, 트럭 운전사들이 합류한다. 마치 행진하듯 줄줄이 도청으로 향하는 차량 행렬은 도청 앞에서 계엄군을 마주하고 선다. 그들에게 차량은 전 재산이다. 계엄군이 곤봉 한 번만 휘둘러도 차 유리는 깨질 것이고 깨진 유리 사이로 총과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 즉,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도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차를 몬다. 시민들은 환호하고 계엄군은 잠시 주춤한다. 영화 같은 장면이라면 이게 더 영화 같은 장면이지만 이는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실제 이야기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광주에서는 매년 5월이면 도로 위에서 차량 시위를 재연한다. 택시운전사라는 제목과 무척 잘 어울리는 장면이지만 너무 극적이어서 일부러 배제한 것일까? 감독의 저의는 알 수 없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5월 20일. 버스, 트럭을 선두로

200여 대의 택시가 줄지어 계엄군을 향하는 모습.

이날의 차량 시위는 5.18 민주화 운동을 새로운 단계로 진입시켰다.



당시 차량 시위 모습과

택시 운전사들의 상황을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실재했지만 영화 속에서 다뤄지지 않은 것 중 하나가 바로 노래다. 항쟁의 역사에서 노래를 빼놓을 수 없다. 지독한 현실을 다독이고 서로의 결기를 다질 때면 사람들은 함께 손잡고 손뼉치며 노래를 불렀다.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던 80년대가 민중가요의 전성기였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우리가 현재 부르는 민중가요를 들을 수 없다. 짧게 지나가는 아리랑, 애국가 정도가 전부다. 왜일까? 70년대 후반부터 민중가요가 존재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곡이 나온 것은 광주 항쟁 이후기 때문이다. 많은 민중가요들의 탄생 비화에는 광주 항쟁의 정신이 스며있다. 최근 홍콩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도 한국의 노래가 울려 퍼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울린 그 노래는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홍콩, 대만, 중국, 미얀마, 캄보디아, 일본 등

해외에서 울려 퍼진 임을 위한 행진곡.

40년 전에는 타국인의 눈과 입으로 한국의 소식을 알려야 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부르던 노래로 타국에 용기를 주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총을 맞고 숨진 윤상원. 그보다 2년 전 노동운동을 하다 사망한 박기순. 바른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그래서 용감할 수 있었던 젊은이들의 죽음으로도 독재와 탄압은 끝나지 않았고 작가 황석영과 당시 전남대 3학년이던 김종률 등 광주 지역 예술인들과 함께 ‘죽은 자들을 위해서 산 자들이 무엇이라도 하자’고 의기투합, 〈넋풀이- 빛의 결혼식〉이라는 제목의 창작 노래극을 만든다. 


총 8곡의 노래 중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조의 행진곡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으며 곡조를 들은 황석영은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일부 발췌해 가사를 완성한 곡으로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한 합창곡이다. 그들이 영혼결혼식을 하던 82년 2월 20일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후 광주 항쟁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고 수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과 환희가 덕지덕지 묻은 채로 이 노래는 사람들 속에서 피어있다. 

 

원본 악보. 82년 대중에 공개됐지만

독재 정권 때문에 주로 입으로 전해졌다.

5.18 기념재단과 광주시민들은

이 곡을  5.18 공식 기념곡으로 제정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영혼 결혼식의 주인공 윤상원과 박기순.

둘의 사망과 결혼식 안팎에는

한국 현대사의 가슴아프고도 감동적인 일화들이 속속들이 배어있다.





종종 5월 항쟁이라는 이름이 지금의 10대, 20대들에게는 오래된 과거로 여겨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 세대가 어린 시절 한국 전쟁을 그렇게 느꼈듯. 불과 50년도 되지 않는 간격으로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민중가요라는 말이 낯설고 폭력적인 독재 정권도 현실에서는 먼 풍경이 됐다. 


총을 들고 서 있는 군인들 앞에서 맨몸으로 태극기를 들고 버스 위에 올라가 있는 남자의 사진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나였다면 저럴 수 있었을까. 자신 있게 대답을 내놓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부채 의식을 느낀다. 우리가 ‘그때 광주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과거로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정신과 약을 먹고 큰 소리에 가슴 졸이며 척추가 부러진 채로 살아간다. 수천 명의 김사복이, 위르겐 힌츠페터가, 윤상원이, 박기순이 자신을 버려가며 옳은 것을 찾기 위해 싸워낸 결과 위에 나는 살고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비겁하지 않았던 그 많은 위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할 순 없지만 그들이 지켜낸 정의, 인간의 존엄만은 해마다 기억해야 한다. 5월의 광주 이야기가 지겹다고? 그게 나였다고 생각한다면 지겨워할 수가 없다.



택시운전사, 지금 보러 갈까요?


장혜진 / 초원서점 전 주인장


한때 음악 서점을 운영했던 사람입니다. 음악과 영화 이야기를 이리저리 섞어서 해보려고 합니다. 둘 중 뭐라도 당신에게 재미가 있다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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