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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Jun 10. 2020

집에서 떠나는 새로운 여행

인어공주(2004)

평소 나는 대리만족에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것을 먹방으로 달래거나 가고 싶은 곳을 여행 프로로 달래는 일도 거의 하지 않는다. 현실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판타지물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독 이 영화에서만큼은 총체적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


바다 마을의 아름다운 풍광뿐 아니라 영화 안에 담긴 정서가 따뜻해서 정말로 좋은 여행지를 다녀온 듯한 여운을 주는 영화, 인어공주다.


삶에 공백이라고는 없이 생활만 가득 찬 악착같은 엄마, 갖은 고생으로 늘 기죽어있는 아빠. 서로에게 애정은 물론 공감의 작은 조각조차 없어 보이는 부모가 나영은 지긋지긋하다. 나영이 손꼽아 기다리던 뉴질랜드 여행 날이 다가왔지만 몸이 아픈 아빠가 말없이 사라지고, 아빠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며 찾으러 가자고 재촉하는 나영에게 엄마는 '안 죽는 사람도 있냐'며 모진 말을 내뱉는다. 결국 뉴질랜드 여행을 포기하고 아빠를 찾아 나서는 나영은 이렇게 읊조린다. 


"여행은 나중에, 나중에라도 갈 수 있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떠난 부모의 고향으로의 출발은 뜻밖에도 뉴질랜드보다 훨씬 특별한 여행이 된다. 나영은 현재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가장 반짝거리던 시절의 엄마와 아빠를 마주한다. 목욕탕 세신사로 일하며 아무 때나 침을 툭툭 뱉고 입만 열면 욕이 튀어나오는 구김살 가득한 지금 엄마의 모습은 그곳에 없다. 그런 엄마를 다리미로 꾹꾹 눌러 펴놓은 듯 어느 하나 구겨진 구석 없이 맑고 사랑스러운 '연순'이라는 여인이 있을 뿐이다. 어린 동생을 돌보며 해녀로 살아가는 연순은 매일 우체부 김진국을 기다리며 사랑을 키워간다. 


이들의 사랑은 영화 초반 이미 그 말로가 확인되었기에 그들의 푸르른 시절이 '잊혀진 한 때'라는 것이 더 와닿는다. 그리고 그것이 비단 그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 아리고, 아려서 더 아름답다. 바닷가 마을의 아름다운 풍광과 해녀라는 직업의 특수성, 자전거로 편지를 배달하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도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지만, 이 모든 것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데에는 영화 속에 흐르는 아코디언 선율도 한몫한다. 


특히 메인 테마곡인 My Mother Mermaid는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매혹적인 선율로 바닷바람이 얼굴에 일렁이듯 영화 내내 아름답게 살랑거린다. 영화 음악의 장인 조성우와 한국 아코디언 연주의 대가 심성락이 함께 완성한 이 곡은 후에 광고 음악으로 더 많은 대중에게 알려졌다. 한국 아코디언 연주의 역사는 꽤 길지만 주로 악극이나 뽕짝, 트로트의 반주 악기 정도로 여겨지다가 90년대 국내 음악 시장이 다양해지면서 그 본연의 매력을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심성락이 있다. 


오랜 세월 청와대 악사로 활동했고 트로트부터 영화음악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7000여 곡의 연주에 참여했지만, 그의 독집 앨범이 나온 것은 활동 50여 년 만의 일이다. 50년 연주 인생을 보여주듯 그의 음반에는 탱고, 트롯트를 비롯해 이 곡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영화음악이 담겨있다. 영화가 끝난 뒤 감흥을 이어가고 싶다면 이 음반을 들으며 사색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다. 특히나 초여름의 반짝거리는 햇살과 바람을 만끽하면서 들으면 온갖 낭만들이 살아 숨 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어공주처럼 바닷속을 유영하던 해녀 연순. 인어공주가 사랑을 얻기 위해 목소리를 내줘야 했던 것처럼 박복한 삶을 살아내느라 결이 곱던 사랑을 세상에 내어준 엄마. 인어공주라는 제목은 그런 엄마에게 나영이 주는 연민과 위로와 감사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 나영처럼, 바다 내음 가득한 흙길을 걸으며 엄마의 젊은 시절을 여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영화의 여운이 내 엄마의 젊은 시절에 대한 상상과 엉켜 오래도록 남는다. 


코로나로 인해 단조로워진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 곁을 지켜준 존재들의 삶을 살피는 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타인의 삶을 추억해보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로의 여행일 테고 여행이 끝난 후에는 그들의 삶을 더 큰마음으로 안아줄 수도 있을 테니 꽤 흥미롭고 아름다운 여행이 될 것만 같다.



인어공주, 지금 보러 갈까요?


장혜진 / 초원서점 전 주인장


한때 음악 서점을 운영했던 사람입니다. 음악과 영화 이야기를 이리저리 섞어서 해보려고 합니다. 둘 중 뭐라도 당신에게 재미가 있다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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