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2001)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김광규, 선생 역)
“……장의삽니더.”(장동건, 동수 역)
“장의사? 그래 이놈아. 느그 아부지는 죽은 사람 염해가며 니 공부시키는데, 공부를 이 꼬라지로 하나. 어이?” (선생)
퍽퍽퍽~
2000년대 초반, 수많은 관객의 기억을 1981년으로 되돌렸던 영화 『친구』의 명장면이다.
그런데 나는 당시 이 장면을 보면서 정말로 슬펐다. 이게 교육인가? 교육이라면 뭘 가르치는 교육인가? 이건 결코 교육이 아니다. 학생과 그 가정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은 도대체 왜 학생을 모욕하는가? 한 선생님의 일탈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이다.
교육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큰 관련이 있다. 객관식 시험이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반이었다. 빠른 시간 안에 대량으로 물건을 생산하듯이, 빠른 시간 안에 사람들을 선별해내기 위해 나온 시험방식이 객관식이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이른바 ‘테일러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가 주창한 이 노동자 관리기법은 관리자가 초시계를 들고 노동자의 행동을 초 단위로 관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리하면 노동 생산성이 다섯 배 이상 증가한다는 것이 테일러의 주장이었다.
테일러 시스템이 확립된 이후 노동자는 공장에서 철저히 부속품 취급을 받았다. 관리자가 “일어서” 하면 일어서고, “쉬어” 하면 쉬는 존재였다.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철저히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아무리 기계 취급을 받아도, 아무리 모욕을 받아도 반항해서는 안 된다. 그게 테일러 시스템의 핵심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자본가는 어떤 노동자를 원했을까? 창의적이고 아이디어가 넘치는 인재? 천만의 말씀이다. 초 단위로 기계처럼 일만 하면 되는데 창의성을 어디다 써먹겠나?
이 시기 자본가들이 원했던 노동자는 기계처럼 일을 시켜도 찍소리 안 하고 묵묵히 지시를 따르는 ‘복종형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복종형 노동자의 최고 덕목은 모욕을 참는 능력이다. 아무리 기계 취급을 받아도, 아무리 모욕을 받아도 노동자는 반항해서는 안 된다. 그게 테일러 시스템의 핵심이다.
나는 한국의 교육이 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모욕을 참는 능력, 복종하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과장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장담하는데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고등학교 수학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 절대 미분과 적분을 이해할 수 없다. 이건 사교육을 일절 시키지 않고 두 자녀를 키워본 아빠로서 하는 말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수업 시간 내내 한 마디도 못 알아들으면서 50분을 버티는 인내력을 키워야 한다. 도대체 왜 그것을 알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그냥 복종한다. 그리고 성적이 나쁘면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따위의 모독을 견뎌야 한다. 그게 바로 대량생산 시스템에서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백 보를 양보해 그때는 그런 노동자가 필요했다고 쳐도, 지금도 그런가? 바야흐로 창의성의 시대다. 창의성은 복종이 아니라 불복종에서 나온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에서 창의성이 싹튼다. 고작 객관식 문제로 사람을 평가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을 강제로 듣게 하고, 성적이 안 좋으면 패배자 취급을 하고…. 이게 창의성의 시대에 걸맞은 교육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교육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친구, 지금 보러 갈까요?
이완배 / 민중의소리 기자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네이버 금융서비스 팀장을 거쳐 2014년부터 《민중의소리》 경제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두 자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가치 있는 행복을 물려주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