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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Aug 10. 2020

죽은 여자들

빅 히트(1953)



프리츠 랑의 1953년작 <빅 히트>는 얼핏 보면 경찰과 조폭이 결탁한 타락하고 비정한 도시에 대항하는 형사의 전형적인 무용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지나온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굉장한 장르적 재미를 선사한다). 형사 베니언은 약간은 냉소적이고 비뚤어진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부패로 썩었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침을 뱉는” 전형적인 필름 누아르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로저 에버트의 말마따나 이 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기만적이고 표리부동”하다. 


이를테면, 여러분이 <빅 히트>를 보게 된다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실한 경찰이자, 부패에 맞서 싸우는 형사 베니언이 아니라, 악당인 빈스의 여자로 등장하는 데비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질 것이다. 처음으로 데비가 등장하는 신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던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잠시 동안 거울을 들여다본다. 마치, 자신은 산만하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종달새’ 같은 여자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는 듯이. 


하지만 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종종 그런 식으로 데비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머리를 만지거나, 춤을 추고, 심지어 노래를 부르는 걸 볼 때 우리는 그녀가 거울 속 자기 자신에게서 씁쓸하고 경박한 자기만족 같은 것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데비는 자신이 출연하는 모든 장면에서 그러한, 이중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데비가 베니언을 유혹하려고 했을 때, 베니언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빈스 손을 거친 거라면 뭐든지 사양하겠어.” 하지만 데비는 그런 말에 상처 받지 않는다. 그녀는 그 말이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문을 꽝 닫고 나가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돈 때문에 악당의 여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부자와 가난뱅이 노릇을 다 해봤지만, 부자가 훨씬 낫다고요.” 그녀는 빈스가 끓고 있는 커피를 자신의 얼굴에 부어서 한쪽 얼굴에 흉터 자국이 생겼을 때도 베니언에게 “한쪽에만 흉터가 생긴다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죠. 옆으로 비스듬히 살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요.”라고 말하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녀가 빈스를 용서한 건 아니다. 그녀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누아르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복수를 한다. 


<빅 히트>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여자 중 무려 네 명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표피적으로 사건을 쫓아가고 해결하는 사람은 베니언을 비롯한 남자들인 것 같지만 언제나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거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여성들이다. 


심지어 베니언이 사건을 조사하러 간 정비소의 (몸이 크고 우락부락한) 남자는 “두려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화를 내며 베니언을 쫓아내지만, 한쪽 다리를 저는 왜소한 늙은 여자 직원은 자신도 똑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베니언에게 진실을 말하고 사건 해결을 위한 도움을 준다. 


이 영화에서 진실을 말한 대가로 가장 처음으로 죽음을 맞이한 여성, 루시 채프먼은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이다. 그녀에 대해 바텐더는 “하루살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밑바닥 인생”이라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는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죽음이 있다.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를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에도 어쩐지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다. 사건의 해결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는 사건 해결을 위해 죽은 여자들의 이름 하나 나오지 않는다. 뺑소니 사건이 발생했다며 급하게 경찰서를 빠져나가는 베니언의 모습을 보며, 저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얻은 알량한 안온함은 죽은 여자들의 피를 담보로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들 모두가 그러한 부채 의식을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것이 <빅히트>가 지금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를 되돌려주는 방식이다. 어쩌면 우리는 좀 더 많은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빅 히트, 지금 보러 갈까요?


손보미 / 소설가


2009년 <21세기 문학>,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 중편 <우연의 신>, 장편 <디어 랄프로렌>을 출간했죠. 망드를 즐겨보는 고독한 빵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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