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
국내 한 영화제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다른 직장인들과 조금 다른 업무 주기를 갖는다. 매년 상반기 6개월 정도는 봄과 친구와 가족들을 잃고 주말도 누릴 수 없는 강력한 업무 강도를 이겨내야 하되, 하반기 6개월은 다시 정상적인 삶의 루틴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하반기의 6개월을 영화제 관계자들은 ‘비수기’라고 지칭하는데 약간의 ‘한량’ 같은 삶도 허용된다. 비수기 때 마다 나는 주로 빈지워칭(Binge-watching)을 선택한다. 빈지워칭은 폭음, 폭식이라는 뜻의 ‘빈지(binge)’와 보다 라는 뜻의 ‘워칭(watching)’을 합쳐 만든 신조어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한 번에 몰아 보는 행위를 일컫는다.
영화를 좋아해 영화제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막상 6개월 동안은 영화를 보지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 때문에 영화든, 드라마든 내 영혼에 인풋(input)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멍하니 소파에 누워 계속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 전 시즌을 마치고 나면 ‘이제 정신 좀 차려야겠다’ 하는 순간이 온다. 바로 빈지워칭(Binge-watching)의 긍정적 효과다.
영화제에서 일한 지 1년 차엔 <뉴스룸>, 2년 차엔 <스킨스>, <미스핏츠>, 3년 차엔 <왕좌의 게임>을 정주행했다. 생각해보면 각 연차에 맞는 프로그래밍이었다.
‘1년차’,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영화제에 뛰어든 나를 <뉴스룸>의 신참 ’매기 조던’에 대입하며 다시금 열정을 다졌고, 열정에 몸을 맡겼건만 사회생활의 현실에 부딪혀 정신 못 차리던 ‘2년차’엔 방황하는 영국의 10대들을 보며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상사와의 관계, 동료 및 팀원들의 관계, 사내 묘한 정치적 긴장감까지 신경 써야 해 피곤한 ‘3년차’에게 <왕좌의 게임>은 조금 색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왕좌의 게임>을 정주행하고 난 뒤, 나의 직장생활, 사회생활의 지침서로 삼기로 했다. <왕좌의 게임>을 감히 밀레니얼 세대 직장인의 ‘삼국지’와 같다고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여러 가문의 동맹과 배신, 전쟁, 그리고 권모술수, 그 안에 직장인에게 필요한 조언이 가득하다.
1화에서부터 그 가르침은 시작되는데, 바로 누구보다 명예로웠던 ‘에다드 스타크’의 죽음이다. 이는 직장생활 3년 차가 맞닥뜨린 현실과 동일한데 꼭 명예를 지키는 사람이 살아남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현실이 억울하게 느껴진다면, 이쯤에서 ‘아리아 스타크’를 주목해야 한다.
아리아는 아버지의 처형 장면을 목격하고 가문의 떼죽음(‘피의 결혼식’) 속에서도 살아남아 온갖 풍파를 마주하며 성장하는 캐릭터이다. 명예를 중시했지만 비참하게 참수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리아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사내로 속이며 도망을 치고, 칼을 다루는 법, 사람을 죽이는 방법도 배우게 되며, 매일 밤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데스 노트’를 조용히 읊는다.
결국 신념을 지키면서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손에 피를 묻힐 줄도 알아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되며, 이후에는 ‘얼굴 없는 자’가 되기 위한 여정을 거친다. 그 여정 속에서 가끔은 복수에 눈이 멀기도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며 성장한 아리아는 마지막 시즌까지 살아남으며 대미를 장식한다.
명예를 지키느라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에다드 스타크를 보며 허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를,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되새기는 이유는 결국 마지막 화에서 스타크 가문의 아이들이 이 대장정에 종지부를 찍게 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 비열한 이들이 잘되는 꼴을 보면서 이들을 한 방 먹일 수 있는 스킬을 장착하려고 노력하지만, 한편으론 명예롭게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도 잊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는 이유다. 아리아가 살아남기 위해 사냥개 하운드로 불리는 ‘산도르 클리게인’과 동행하지만, 그가 죽기 직전 고통스러워할 때 직접 죽임으로써 안식을 내어 주기보다는 끝까지 고통스럽게 죽도록 버리고 가는 모습을 보며 신념 없이 살아가는 자에 대한 응징, 진정한 복수라 느꼈다. 그래, 정도를 지킨 진정한 복수가 가장 통쾌하다.
또, 직장생활에 필요한 덕목에 있어 주목하게 되는 한 사람은 ‘티리온 라니스터’이다. 티리온은 어머니를 죽이며 태어나 왜소증을 앓고 가족의 원수 취급을 받지만 어렸을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지혜 덕분에 마지막 시즌까지 살아남는 캐릭터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터득한 수많은 장점을 통해 살아남는다. 전쟁터에 참전할 수는 없지만 뛰어난 전략가이자, 어떤 것을 내어주고 받아야 하는지 탁월한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외교력도 가지고 있다.
특히, 티리온이 아버지 ‘타이윈 라니스터’ 대신 자신의 조카 ‘조프리’의 왕의 대수가 되었을 때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티리온은 소의회의 일원 중 한 명이 여왕인 세르세이의 끄나풀로 이전 왕의 대수였던 ‘에다드 스타크’를 죽이는데 가담했을 거라 예상하고, 미리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파악하려 한다.
이를 위해 소회의 일원들에게 각각 다른 정보를 퍼트리고 세르세이에게 어떤 정보가 퍼지는지 확인하는 장면에서는 그의 지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혜뿐 아니라 그는 인간에 대한 연민도 느낄 줄 알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고, 이는 직장 생활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매우 필요한 덕목들이구나 깨닫게 된다.
<왕좌의 게임>의 대서사를 빈지워칭하며, 앞으로 어떻게 직장생활을 해야 할 지 고민해보게 되는데 결론은 ‘발라 모굴리스’다. <왕좌의 게임>에 빠지고 나면 한동안 입에 달고 사는 말인데, 드라마 내 배경이 되는 에소스 지역, 특히 브라보스에서 쓰이는 인사말로 ‘모든 자는 죽어야만 한다’ 혹은 ‘모든 이들은 죽는다’라는 뜻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죽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직장생활, 크게 고민하지 말자.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자.
빈지워칭이나 하면서.
왕좌의 게임, 지금 보러 갈까요?
강사라 / 전주영화제 프로젝트마켓 팀장
국내 한 영화제에서 제작 지원 파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부업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어요. 발라 모굴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