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 (2000)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아. 낙원처럼 환상적인 비치가 있대.”
디카프리오 주연의 <비치>는 소문 속 파라다이스를 찾아 나섰다가 지상 낙원은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주인공의 성장담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대단함은 픽션에 그치지 않는다. 2000년에 개봉한 이 영화를 보고 너무 많은 관광객이 촬영지를 찾은 탓에 해양 생태계가 심하게 파괴된 것이다.
매일 200척의 보트가 4,000여 명의 관광객을 실어날랐다고 한다. 산호가 눈에 띄게 사라지자 섬은 작년 6월부터 아직도 관광객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낙원은 실재할 수 없다더니... 영화 스토리가 현실이 됐다.
“상상해봐. 눈처럼 모래는 하얗고 물은 수정처럼 투명해. 야자수 코코넛, 그리고 대마초가 지천으로 널렸대. 거길 아는 사람은 극소수며 자기네끼리만 비밀이래.”
여행객들의 사이에서 입소문으로만 퍼진 신화의 섬. 디카프리오는 태국 방콕 카오산로드의 싸구려 호텔에서 우연히 섬 비밀 지도를 손에 넣는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섬. 1시간 54분짜리 영화에서 38분이 돼서야 그 비치가 등장한다. 마침내 해변을 보자마자 털썩 주저앉는 디카프리오.
카메라는 마치 세계테마기행처럼 고전적으로 패닝하면서 에메랄드 바다와 고운 백사장, 소담한 절벽과 푸른 하늘을 보여준다. 절경에 감동한 주인공만큼 관객들도 스크린 속 풍경에 매료된다. 나도 어디 가면 관광객이라서 그런가. 갑자기 감정이입이 된다. ‘F*king Beautiful’이란 비속어 대사가 마침 깔리는데,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그래. 소문이 사실이구나.
<트레인스 포팅>과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유명한 대니 보일 감독. 이 영화를 찍기 전 지구상의 해변이란 해변은 죄다 둘러보았다고 한다. 얼마나 로케이션에 공을 들였을까. 그렇게 지난한 과정 끝에 낙점한 곳일 테니 관객 입장에선 믿고 갈만한 관광지임엔 분명할 것이다. 영화 속 촬영지로 자동 홍보가 되니 여행 상품들도 넘쳐났을 테고. 생각해보면 섬이 파괴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18년이 걸렸지만.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송하고 나면 시청자들이 촬영지를 묻는 경우가 꽤 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포털에 프로그램명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촬영지가 뜰 때도 있다. 자연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그래서 장소 보안에 민감하다.
아무리 공들여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해당 촬영지가 파괴되거나 촬영에 협조해준 동∙식물에 피해가 가면 치명적이다. 그렇게 방송업계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 PD도 여럿 있다. 자연 다큐멘터리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생각보다 손쉬운 일이라 촬영할 때나 방송 나갈 때나 신경이 곤두선다.
“암세포, 기생충, 세상을 오염시키는 더러운 족속들.”
영화 속 주인공은 태국을 찾은 배낭여행객들을 혐오하며 위의 대사를 내뱉는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저런 대사에 거부감 들면서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오바한다고 여겼다. 공감이 안 됐으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고 여행과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크게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파타야나 코타키나발루의 해변을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큰 기대와 달리 흥행에 실패하면서 디카프리오의 흑역사로 남은 영화 <비치>는 2018년 6월 피피 섬의 폐쇄 결정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밖으로 강제 소환됐다. 나 또한 <인류세>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해당 기사를 접했고 피피 섬의 환경 문제를 다큐에 포함할까 검토하다가 당국이 다큐 제작진도 촬영 허가를 잘 안해줄 것 같아서 포기한 바 있다.
최근 기사에 따르면 폐쇄 기간을 연장해 2021년에나 일반인의 방문이 허락된다고 한다. 2년 뒤 피피 섬은 어떤 모습일까. 체르노빌과 DMZ가 사람의 발길이 끊기며 자연이 기적적으로 회복된 것처럼 피피 섬에도 그런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지길 바란다.
아직 비치의 스토리는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최평순 / EBS PD
환경·생태 전문 PD입니다. KAIST 인류세 연구센터 연구원이고, EBS 다큐프라임 <인류세> 등 연출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