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병소장 (2010)
‘진항생’과 ‘방사룡’. 성룡은 본명이 두 개다. 사정은 이렇다.
성룡의 아버지 방도룡은 제2차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군의 정보요원으로 일했고, 국공내전으로 생명이 위험해지자 홍콩으로 도피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홍콩에서 만난 두 번째 부인 진월영의 성씨를 따온 가명 ‘진지평’을 사용했는데, 방도룡과 진월영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성룡이다.
성룡 또한 1990년대 말까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진씨로 살았다. 난징 대학살과 제2차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피해 홍콩(港)으로 도망온 두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生) 아이, 진항생이라는 이름 뒤엔 그런 사연이 있다.
성룡은 자신의 진짜 성씨를 모른 채 자랐고,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 호주로 떠난 10년간 우점원 희극학교에 맡겨져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받았다. 계약 조건에는 “교육 중 사고로 사망하더라도 학교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옥 같은 훈련 뒤 영화계에 진출했지만 일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1978년 마침내 <사형도수>로 스타덤에 오른 성룡은 80년대 내내 온 아시아를 호령하는 액션스타로 군림했지만, 그가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린 할리우드는 그 기간 내내 그를 이방인 취급했다.
89년엔 영화계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대영 제국 훈장 구성원 서훈을 받았지만, 그땐 이미 영국과 중국 사이에 홍콩 반환 협정이 체결된 이후였다. 그는 방씨지만 진씨였고, 부모가 있지만 부모가 없었고, 보호자가 있었지만 보호받지 못했다. 슈퍼스타였으나 이방인이었으며, 영연방 시민권자로 서훈을 받았으나 8년 뒤엔 중국인이 될 운명이었다. 그는 늘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살았다.
89년 천안문 항쟁 당시 대학생들을 지지하는 콘서트를 열었던 성룡이, 2000년대 이후 급격하게 중국정부의 스피커로 변신해 홍콩 우산혁명을 비난하고 검열을 긍정하게 된 건 분명 중국 본토에서 원활하게 사업을 펼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가끔 성룡의 최근 행보가 어쩌면 그가 살아온 생애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의심한다. 국외자로 살아온 이들이 공동체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의식적으로 체제 충성에 몰두하는 광경은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 아닌가. 빨치산의 아들들이 연좌제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우파가 되고, 한 시절을 주사파로 보낸 이들이 자신의 전향을 증명하기 위해 뉴라이트라는 새 사조를 만들어내는 광경.
성룡이 10여년간 준비해 만들었다는 작품 <대병소장>의 결말은, 결국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잠재우고 태평을 이루었다는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분명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하며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난하고 대만의 민주정을 ‘혼란하다’고 비판해 온 성룡의 행보가 반영된 결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딘가 미심쩍은 대목이 있다. 내레이션이 나오기 직전 상황을 보자. 고향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어하던 늙은 병사(성룡)는,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고향 양나라가 이미 진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했음을 발견한다.
영화 내내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이리 도망치고 저리 도망치는 잔꾀를 뽐내던 늙은 병사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 활을 겨눈 진나라 병사들 앞에서 투항을 거부하며 “아직 내가 살아있으니 양나라는 멸망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고슴도치 꼴이 되어 쓰러지면서도 양나라 깃발을 내리지 않은 병사는 마지막 숨을 모아 혼잣말을 남긴다.
나는 양나라를
망신시키지 않았다.
내레이션으론 강대국이 주도하는 평화를 긍정하면서도, 정서적·서사적 클라이막스는 자존을 지키기 위해 강대국의 치세를 거부하고 양나라 백성으로 죽기를 선택한 소시민의 몫으로 내어준 이 불균질한 결과물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던 걸까? 자기 자신도 몰랐던 본심의 한 자락이 슬며시 삐져 나왔던 걸까?
홍콩 시위에 관해 모른다고 말해 다시 한번 홍콩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왕년의 따거(大哥)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묻고 싶어진다. <대병소장>의 이야기를 구상했던 10년 간, 그의 마음의 국적은 진나라였는지 양나라였는지 말이다.
대병소장, 지금 보러 갈까요?
이승한 / 칼럼니스트
열 두살부터 스물 세살까지 영화감독이 되길 희망했던 실패한 감독지망생입니다. 스물 넷부터 서른 여섯까지는 TV와 영화를 빌미로 하고 싶은 말을 떠들고 있죠. 자기 영화를 왓챠에 걸었으면 좋았으련만, 남의 영화를 본 소감을 왓챠 브런치에 걸게 된 뒤틀린 인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