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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Sep 21. 2019

‘자니?’라고 하지 마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2007)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불쑥불쑥 바쁜 틈새를 비집고 생각이 나는데 어떡하죠?’

‘잘 지내냐고 톡했더니 답은 해주더라구요. 다시 만날 가능성 있는 거 아닌가요?’

‘헤어진지 1년이 지나도 아직도 생각나요. 지겹게 싸웠는데 그립네요’


심야 라디오를 하다보면 종종 마주하는 이런 사연들. 밤이 되면 슬그머니 삐져 나오는 마음이 있나보다. 이런 사연들이 소개되고 나면 뒤이어 이런 사연들도 도착한다.


‘다시 만났고 엄청 노력했지만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았죠. 그때 다시 찾아 가지 말걸 지금도 후회중요.’

‘헤어지고 1년 만에 재회에서 결혼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미련 남으면 다시 연락하세요’


연애 상담 코너를 할 때 이별과 재회가 주제인 날 유독 사연들이 팽팽하다. 다시 만날 수 있다 vs 없다.


사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것은 누가 봐도 케바케, 사바사...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건 그만큼 지금 당장 괴롭기 때문이다.


‘자니’라고 연락해보고 싶은 밤, 그런 밤에 어울리는 영화가 있다. ‘마이 블루 베리 나이츠’



영화의 주인공은 가수 노라 존스와 주드로.

그리고 감독은 왕가위다.


‘헐리웃판 중경삼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화에선 왕가위 특유의 감성이 짙게 묻어난다. (어설픈 영어식 중경삼림이란 혹평도 있지만) 왕가위 특유의 감성이라 하면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아프고 상처받은 인간들과 흔들리는 카메라, 어두운 밤 도시의 네온사인 이런 것들..


다른 여자를 만나는 남자친구를 목격하고 이별을 하게 된 노라존스. 남자친구 집 앞 호프집에서 가게 주인 주드로에게 이별의 이유를 알고 싶다고 하소연을 하는데, 주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그런 건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어요.

아예 이유 같은 건 없을 때도 있구요.

치즈 케이크와 애플 파이는 다 팔리는데

블루베리 파이는 손도 안 댄채 남아요.

잘못된 거 없어요. 다른 걸 주문할 뿐.”


그 밤, 결국 안 팔려서 끝까지 남은 블루베이 파이를 먹고 노라존스는 떠난다. 레스토랑과 술집을 오가며 바쁘게 일하는 노라 존스.


새로운 동네에서 만난 어니라는 이혼남. 어니와 그의 전 부인이 헤어지고도 진짜 헤어지지 못했던 쓸쓸한 스토리가 끝나고 또 다시 길을 떠나는 노라 존스.


이번엔 나탈리 포드만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는데, 그녀와 아버지의 이별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도착지는 제레미의 호프집. 그녀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블루베리 파이 한 조각.


노라 존스가 길을 떠난 이후부턴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이별 스토리가 나오는 로드 무비가 된다. 다양한 사람과 스토리가 계속 등장하지만 한결같은 이 영화의 정서는 이별, 그리고 도시의 쓸쓸함이다. 노라 존스의 음악 같은 달짝한 끈적함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동시에 도시의 쓸쓸한 불빛도 계속 반짝인다.



노라존스는 재즈 싱어송라이터로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가수인데 ‘Don’t know why’ 라는 곡이 들어있는 데뷔 앨범으로 그해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과 올해의 레코드 상, 올해의 여자 보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엄청난 가수인 만큼 연기는 그 명성을 따라가진 못했지만 노라 존스의 음악은 이 영화와 제법 잘 어울린다.


‘자니’ 라고 연락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꾹 참고 이 영화를 보면 어떨까.  


영화 속 항상 남아있는 블루베리 파이 한 조각처럼, 다른 게 다 팔리고 없을지라도 혼자 남은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결말을 준비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헛헛한 마음을 달게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도 그 마음이 눌러지지 않는다면 심야의 라디오에 ‘자니’라고 보내보는걸 추천한다. 구여친 구남친 대신 친절하게 답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운이 좋으면 커피 쿠폰도 받을 수 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도저히 오늘 그 사람에게 연락을 안하면 죽을 것 같아서 꼭 반드시 연락을 해야겠다면... 차라리 ‘자니’ 대신 ‘깼니’라고 보내보시길.


그리고 그 결과는 라디오에 사연으로 보내 주세요.

저도 궁금합니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지금 보러 갈까요?


최유빈 / KBS 라디오 PD


매일 음악을 듣는게 일 입니다. 0시부터 2시까지 심야 라디오 '설레는 밤 이혜성입니다'를 연출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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