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왓챠 WATCHA Oct 22. 2019

당신은 영혼의 나무를 찾았나요?
<님포매니악>

님포매니악(2013)



라스 폰 트리에는 당최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저렇게 파격적인 서사를 펼칠까 궁금한 감독이다.  


<멜랑콜리아> (2011)에서는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며 파국을 맞는다. 대재앙 앞에서 누구는 종말을 부인하고 어떤 이는 걱정하는데, 주인공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은 덤덤하다.


“지구는 사악해. 우리가 지구를 위해 비통해야 할 이유가 없어. (“The earth is evil; we don't need to grieve for it”).


주인공의 대사가 감독의 생각을 반영한다면 혹시 라스 폰 트리에는 인류세를 안 것일까? 인류세는 자멸의 서사를 드러내는 시대 이름이다.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소행성 충돌이나 빙하기 도래 같은 극적이고 큰 힘이 작용할 때 다섯 번의 대멸종이 발생하고 새로운 지질 시대가 열렸다. 


많은 과학자들이 여섯 번째 대멸종과 지구적 큰 변화가 이미 시작됐기 때문에 현재의 지질 시대 이름을 바꾸자고 말한다. 소행성 충돌이 아니라 인류의 활동이 대멸종 원인이니, 인류의 이름을 따 인류세(人類世)다. <멜랑콜리아>의 비극이 소행성 ‘멜랑콜리아’에 의해 발생한다는 설정이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까닭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2014년 개봉작 <님포매니악>은 또 다른 파격이다. 이번엔 아예 색정광의 성적 오디세이를 4시간 동안 펼친다. (영화관에선 볼륨 1, 볼륨 2로 나눠서 개봉했다) 



주인공 조(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수천 명의 상대와 자지만, 외롭고 공허하다. 심지어 불감증까지 겪는다. 고난 속에서 그녀는 생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이 영화는 자극적인 소재를 높은 수위로 다룬 작품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욕망과 소통의 부재, 관계의 갈구 등 매우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다.     


비교육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 교육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아버지(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어린 조에게 생태를 가르칠 때다.  


“물푸레나무가 창조됐을 때 다른 모든 나무들이 질투를 했지. 가장 멋진 나무였거든.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다 떨어지자 딴 나무들이 물푸레나무의 검은 봉오리를 비웃었어. ‘봐, 물푸레나무는 손가락에 까만 재가 묻었어.’”


겨울에도 검은 봉오리를 가진 물푸레나무는 숲의 다른 나무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 특성을 쉬운 말로 풀어주는 아버지. 남들과 다른 차원의 욕망을 가진 조는 자신을 검은 봉오리에 투영하며 성장한다.


“겨울엔 나무의 영혼만 보여.” 


과학을 신봉한다는 의사 아버지는 나무 앞에 서면 시적인 표현을 쓰곤 했다.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 숲에는 모양이 다 다른 나무들이 가득하다. 비틀린 영혼, 평범한 영혼, 미친 영혼까지.


조가 청소년으로 자랐을 때 아버지는 자기의 나무를 찾았다고 알려준다. 그가 숲에 데려가 보여준 나무는 물푸레나무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나무는 떡갈나무였다. 의아해하는 조에게 말한다.


“보면, 알게 돼.”


몇 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기댈 곳이 없어진 조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숲에서 산책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 살기는 힘에 부치고 남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한다. 색정광에게 찾아온 불감증, 성병,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 중년이 된 조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떠나기 위해 산에 오른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다. 자신의 나무를. 


황무지 같은 돌산에서 척박한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굽은 몸통이지만 생명력 있게 가지를 뻗은 그 나무에서 조는 용기를 얻는다. 


“난 세상과 꿋꿋이 맞설 거에요. 언덕 위의 그 굽은 나무처럼. 내 모든 고집스러움과 힘을 다해서 거칠게 싸울 거에요.” 


배경음악으로 장엄한 클래식 선율이 흐르고 조가 나무와 함께 서 있는 장면은 영혼의 교감을 보여주기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찾고 싶어진다.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을법한 영혼의 나무. 나는 언제 그 나무 만날 수 있을까? 영화계에서 가장 문제적인 감독 중 하나인 라스 폰 트리에가 섹스와 폭력 등 강렬하고 자극적인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던진 질문은 너무나 점잖고 진지해서 자꾸 되뇌게 된다. 


당신은 영혼의 나무를 찾았나요?




님포매니악, 지금 보러 갈까요?


최평순 / EBS PD


환경·생태 전문 PD입니다. KAIST 인류세 연구센터 연구원이고, EBS 다큐프라임 <인류세> 등 연출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쓸쓸하지만,씩씩하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