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1982)
두 달 전쯤부터 나는 올해의 마지막 달에는 꼭 <블레이드 러너>를 다루겠노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흠, <블레이드 러너>에 대한 설명이 과연 따로 필요한걸까? 이를테면, 이 영화가 무려 세개의 판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
1982년의 극장판, 그리고 십년 후 나온 감독판, 그리고 2007년에 다시 나온 파이널컷이 바로 그것이다. 널리 알려졌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판본은 감독판(물론 파이널컷이라고 해도 좋다. 이 둘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훗날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영화나 일본애니메이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 이제는 언급 자체가 민망할만큼 유명한 사실이다. 나도 근미래를 배경으로 단편 소설을 두 편 썼는데, 그걸 다 읽어본 내 최측근 물고기군님은 어느날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와, 너는
<블레이드 러너>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맞다. 나는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일곱 번도 넘게 봤다. 아니, 열 번도 넘게, 아니, 어쩌면 열두 번도 넘게.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을 것이다. 그 시절, 나와 친구들은 심심하면 누군가의 집에 모여서 비디오(내 기억엔 분명히 VHS 비디오인데, 아, 정말로 내가 이토록 옛날 사람인걸까?)를 보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블레이드 러너>였다(그 당시 내가 본 건 감독판이었는데, 나중에 극장판을 보고나서 어리둥절해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 취향은 제각각이어서 심지어는 독일코메디(!)를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 영화가 취향이었던 사람은 그 중에 나 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각종 색깔펜과 스티커 등등으로 다이어리를 꾸미는 게 유행이었고, 나도 다이어리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영화 잡지에서 <블레이드 러너>와 관계된 기사나 글이 있으면 나는 그걸 오려서 코팅 한 후 다이어리에 끼어놨다.
그 영화의 무엇이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었던 것일까? 지금 다시 봐도 놀라울 정도의 시각적 경험? 미치도록 음울하면서 퇴폐적인 디스토피아의 분위기? 리플리컨트보다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리플리컨트라는 철학적 질문?
조금 솔직해지자면 이 영화에서 내 마음을 무엇보다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은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데커드’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데커드’는 레이몬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의 다른 판본이다. 데커드는 비오는 도시에서 쓸쓸하게 국수를 씹고,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업무-리플리컨트를 제거하는 일-를 마친 후에는 상처난 얼굴로 도시를 바라보며 술 한잔을 마신다.
한 가지 장면. 그는 리플리컨트에게 신나게 얻어터진 후 집으로 돌아와, 세면대 앞에 선다. 물로 입 속의 피를 씻어낸 후, 세면대에 담긴 물 속으로 얼굴을 담구는 그의 옆모습은 이 영화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 마음 속에 남아있다.
'데커드'가 '필립 말로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을 위해 도피를 감행한다는 점이다. 아주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뜻밖에도, 리플리컨트 '로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화성에서 군인으로 사용되면서 끔찍한 일들을 겪은 리플리컨트인 로이는 (“나는 너가 상상도 못할 것들을 봤어.”) 리플리컨트에게 정해진 수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창조주나 마찬가지인 타이렐사의 회장 타이렐을 만나러 간다. 그가 더 살고 싶다고 하자, 타이렐은 이렇게 말한다.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
그러자, 로이는 이렇게 되묻는다.
“당신은 충실히 살았겠죠?”
로이(를 비롯한 리플리컨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4년이다. 하지만 타이렐은 그보다는 훨씬 더 오래 살았다. 그들의 수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이유는 누가 충실하게 살았느냐와 관련된 것은 결코 아니다. 타이렐은 인간이라서, 그리고 로이는 리플리컨트이기 때문에(물론 이 차이가 엄청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으리라).
이런 식의 비약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지만, 어쩐지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은 욕구를 떨치기 어렵다. 그러니까, 이건 운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어서 글을 쓰고 커피를 마시고 웃고 울고 하는 것은 내가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그건 그저 우연적인 결과일 뿐이라고 말이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삶 역시 그런 식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살아있는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 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당신은
충실하게
살았겠죠?
<블레이드 러너>는 우리를 이러한 질문 앞으로 가져다 놓는다. 나는 저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아,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건 내가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 탓에 장황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이 영화의 매력을 못 전한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난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 이 글을 읽는 건 그만두고 당장 <블레이드 러너>를 보러가시라. 이 영화의 배경인 2019년이 다 지나가기 전에.
덧붙임) 왓챠플레이에는 <블레이드 러너>의 극장판이 올려져 있다. 관계자분들, 감독판으로 바꾸어주세요!
블레이드 러너, 지금 보러 갈까요?
손보미 / 소설가
2009년 <21세기 문학>,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 중편 <우연의 신>, 장편 <디어 랄프로렌>을 출간했죠. 망드를 즐겨보는 고독한 빵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