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와 존중, 음악으로 바라보다.

음악에서 발견하는 인문학

by 시연

최근 혼자 점심을 먹다 ‘배려와 존중’ 이란 주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과거 음악을 했던 경험 탓인지 자연스레 음악에서의 배려와 존중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 음악은 바로 '재즈'. “아니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것 같은 재즈가 배려와 존중의 음악”이라고? 하며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재즈보다는 차라리 오케스트라의 전체적 조화를 말하는 그들은 클래식이 배려와 존중의 음악이라 말한다. 그러나 재즈에 대해서 조금만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그 생각은 바뀔 수도 있다.



스탠다드 재즈 악보 (All Of Me)

첫째, 제멋대로의 음악이 아니다.

옆 악보는 흔히 스탠더드 재즈 악보라고 하는데, 이것이 재즈 연주의 기본 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대부분의 재즈는 이처럼 종이 한 장에 모든 멜로디와 코드가 표기되어 있고(아닌 것도 있다.), 연주자들은 이 기본 틀 안에서 연주한다.



둘째, 모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순간.

재즈 악보에는 주 멜로디만이 표기되어 있다. 처음 연주를 시작할 때 , 주 멜로디를 한번 연주하고부터 진짜 재즈가 시작된다. 각 파트별 연주자는 기본 틀(코드 진행) 속에서 자신의 음악적 표현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데, 이를 솔로잉(soloing)이라고 한다. 솔로잉의 기회는 연주의 구성에 따라 모든 파트에게 주어진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뽐낼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규칙 속에 존재하는 자유.

재즈는 코드 진행이라는 규칙과 연주자 간의 사소한 약속들이 존재한다. 그 속에선 어울리고 덜 어울리는 음이 존재할 뿐, 사용할 수 없는 음은 없다. 최소한의 규칙 속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가치를 품고 있는 재즈는 한 마디로 최고다. (선호에 따른 매우 편협한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재즈를 사랑한다.)

Uehara hiromi - love and laughter. “모던한 타입의 재즈이지만, 위에서 말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


사회 속에서의 배려와 존중은 재즈와 같은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이상적) 하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한다. 최소한의 규칙을 통해 개개인의 표현을 자유로이 그려낼 수 있는 무대. 서로의 소리에 경청하고 그들에게 차례로 말할 기회를 주며, 진실된 의견을 주고받는 자세.



최근, 정치계에서 패스트트랙과 관련하여 여, 야 간의 충돌이 깊어짐에 따라 국민들의 한탄도 깊어지고 있다. 나는 정치에 대해 무지하기에 개인적 판단을 공적인 공간에 쉽사리 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배려와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에는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 색깔에 따른 이념에 의해 인간을 판단하기에는 우린 너무도 복잡한 존재이며, 우릴 둘러싼 삶 또한 그리 단순치 않다.



정치꾼들은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다.(일반화를 피하기 위해 ‘정치가’가 아닌 ‘정치꾼’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몇 번의 대화나 토론으로는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기 쉽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유리한 주장을 무차별적으로 내보임으로써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저울에 권력의 무게추를 더하기 위함. 따라서 최근의 행보는 나에게 있어 정치적 공연이라고 보이며,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정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21살. 군 복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무언가 모를 무언(無言)의 규칙들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왜 일과시간이 끝난 후에도 휴식시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지?", " 왜 내가 윗사람에게 커피를 직접 타서 줘야 되지?",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있는 걸까". 단순히 일과시간이 연장됨에 따라 관련된 모든 것에 불평불만이 생긴 것이었지만, 이는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규칙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를 착취하기 위함을 규범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닐까. 배려나 존중이란 개념은?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야지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자유가 존재하기는 할까?


모든 규범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그것들을 배척했다.



그러다 미덕이 가지고 있는 효용성과 가치에 대한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 이후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저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합의가 오랜 시간을 걸쳐 만들어진 하나의 시스템이며, 시간이 이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시스템 덕분에 우리는 불필요한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현재의 안정적인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기아, 전쟁, 가난, 질병과 같은 문제는 현재 문명에게 더 이상 극복 불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미덕은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 왔기에 죽음이란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의 기반이 되는 미덕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하게 되었고, 누군가는 이를 더 이상 믿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의 유무를 확정 지을 수 있는 단서가 아니듯이 사회적 규범과 규칙들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배려와 존중을 비롯한 여러 미덕은 사회가 안정적으로(여전히 많은 문제가 존재하지만) 유지될 수 있게 도와주는 중요한 시스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가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규범과 문화를 단순히 억압의 장치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행위와도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에 완벽성을 추구하게 된다면, 20세기의 끔찍했던 전체주의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교하게 다듬어 온 기반 위에서 대화를 통해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는 믿음과 이성의 힘을 잃지 않는다면, 한 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사회의 혹은 개인의 불필요한 고통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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