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로마가 아니다. 1970년대 빈부격차가 극심한 멕시코, 그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꽤 잘사는 동네 이름이 로마다. 이 동네에서 한 집에 사는 서로 다른 처지의 두 여성에게 서로 다른 위기가, 삶을 집어삼킬 듯한 파도가 조용히 다가온다.
클레오의 일상은 개똥을 치우고, 바닥에 물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서 옥상에 널고, 아이들을 깨우고, 또 재우고, 자기 전에 집안 곳곳의 조명을 끄는 것이다. 네 명의 아이들은 서로 툭탁대며 꽤 시끄럽다. 그런 아이들, 그 중에도 막내 페페를 대하는 모습이 퍽 다정하다. 클레오는 이 집의 가정부이자 유모다.
입주 가정부란 점에서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의 박사장네 가정부 문광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배우 이정은이 연기한 중년의 가정부와 달리 클레오는 사모님으로 오해받을 일은 없다. 나이는 둘째치고, 아이들 엄마이자 이 집 안주인 소피아와 피부색부터 다르다.
1970년대 멕시코가 배경인 이 영화는 인종의 차이와 종종 중첩되는,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영화의 제목인 <로마>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도 중산층 거주 지역. 클레오가 일하는 소피아네 집은 기생충의 박사장네 대저택에 비하면 처음에는 그리 엄청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를 찾아나선 클레오의 발길을 따라, 도로 포장도 안 된 진흙탕 투성이 다른 동네를 보고 나면, 소피아네 집과 이 동네가 얼마나 여유롭고 안온한 지 뒤늦게 실감하게 된다.
그런 일상에 걱정거리가 생긴다. 클레오가 '임신한 것 같다'고 말하자, 데이트 상대가 사라져 연락이 닿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소피아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해고될 거란 생각에 울음을 터뜨리는 클레오. 하지만 소피아도, 아이들의 할머니도 까탈스러울망정 몹쓸 사람들이 아니다. 병원에 데려가 검진을 받게 하고, 클레오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이어간다.
이 집에도 기생충의 박사장이 말한 '선을 넘지 않는다'의 '선', 계급과 신분의 미묘한 경계는 분명히 있다. 나이도 더 많은 고용주 소피아는 클레오의 위기를 일찌감치 알게 되고 보호자 역할도 하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클레오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소피아의 위기는 은밀하게 그려진다. 출장 가는 남편을 전쟁터에라도 보내는 듯 격렬하게 포옹하더니, 운전하다 자동차에 큰 흠집을 내고, 아이들이나 클레오가 들을까 신경을 쓰면서도 목소리가 빨라지고 날카로워진다. 하지만 점점 불러오는 클레오의 배처럼, 소피아의 일상에 벌어진 균열도 그 정체가 점차 명확해진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어린 시절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로마를 만들었다. 클레오의 모델 역시 어린 그에게 담뿍 애정을 베풀었던 실제 가정부다. 멕시코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해온 그는 오래 마음에 품어온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서 각본과 연출에, 촬영과 편집까지 직접 맡았다.
원래 촬영은 그와 오래 손발을 맞춰온 촬영감독 엠마뉴엘 루베즈키에게 맡기려 했는데, 사정이 생긴 루베즈키가 알폰소 쿠아론에게 직접 카메라를 들라고 권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쿠아론의 영화학교 시절 전공이 본래 촬영이란다.
그는 장면을 조각내 이야기에 우그려넣는 대신 좌우로, 위아래로 카메라를 천천히 움직이며 클레오의 일상 속으로, 클레오가 사는 세상 속으로 관객이 스며들게 한다. 청소할 때 바닥에 뿌려지는 물소리, 길거리 상인들의 손님 부르는 소리 등 일상을 정교하게 담아낸 사운드 역시 이를 돕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래서 이 영화야말로 넷플릭스로 보기 아까운 작품, 대형 스크린과 최적의 음향시설을 갖춘 극장용 영화란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화면이 좀 작다고 감동이 반감될 영화는 결코 아니다.
멕시코의 1970년대는 한국의 1980년대처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한창이었다고 한다. 로마는 이런 시대를 주인공의 일상 속에 녹여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격렬한 순간은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위, 그리고 시위대에 가해지는 폭력과 맞물려 전개된다.
그 순간에도 초점은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 클레오 자신만의 체험과 감각이다. 그리고 클레오가 겪게 되는 두려움과 고통, 남모를 죄의식, 그럼에도 이어지는 일상의 힘이 거대한 파도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기생충 얘기를 자꾸 꺼낸 건 칸영화제 때문이기도 하다. 로마는 지난해 칸영화제가 아니라 그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고,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영화에 대한 높은 안목을 자랑하는 칸영화제가 로마를 탐내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칸영화제는 재작년에 봉준호 감독의 <옥자> 등 넷플릭스 영화 두 편을 경쟁부문에 초청했다가 한바탕 난리를 겪고, 이후로 넷플릭스처럼 프랑스에서 극장 개봉 없이 온라인으로 직행하는 영화의 경쟁부문 진출을 금지했다.
프랑스에서는 극장 개봉을 할 경우 온라인 서비스가 3년 뒤에나 가능하다. 넷플릭스가 로마를 칸에 선보이려면 이런 조건을 감내해야 했다. 칸영화제는 무진장 애를 썼지만 넷플릭스를 설득하지 못했다. 베니스영화제에 이어 올해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로마에 감독상, 작품상, 그리고 외국어영화상까지 세 개의 트로피를 안겼다. 칸영화제는 걸작을 놓쳤다.
기생충의 관객 반응을 참조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로마에는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두 작품 모두 국내 극장 개봉 관람등급은 15세. 넷플릭스용으론 청불 등급을 받았다.
제목 로마(Roma)
감독 알폰소 쿠아론
등급 15세
출연 알리차 아파리시오, 마리나 데 타비라
평점 IMDb 7.8 로튼토마토 96% 에디터 꿀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