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를 위한 시계의 끝
드라마 프렌즈에선 피비를, 섹스앤더시티에선 미란다를 가장 좋아하는 저는 롤렉스(Rolex)에서도 밀가우스(The Milgauss)를 가장 좋아합니다.
당장이라도 전기가 흐를 것 같은 그린랜턴스러운 글래스의 초록색 테두리, 위트있다 못해 키치한 주황색 번개모양 세컨핸즈, 과학자의 시계라는 독보적인 스토리까지. 어느 하나 끌리지 않는 구석이 없었습니다. 사실 실물이 생각보다 커서 놀라긴 했지만요.
그런 밀가우스가 올해 워치앤원더스에서 새 드레스워치 라인인 1908의 출시와 함께 단종 소식을 알렸습니다. 정확히는 1908마저도 밀가우스가 아니라 함께 단종된 드레스워치 라인 첼리니를 대체한 거지만,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선 워낙 독특했던 밀가우스의 마지막이 여러모로 아쉬웠는지 다들 첼리니보단 밀가우스 얘기만 하더군요.
밀가우스는 놀랍게도 데이데이트가 처음 출시된 1956년에 함께 등장한 모델입니다. 얼핏 보기엔 데이데이트가 한 20년 전에 나왔을 것 같지만, 사실은 쌍둥이같은 사이인 거죠.
1950년대는 롤렉스가 공격적으로 다양한 모델을 출시한 해였습니다. 첫 GMT마스터 모델인 ref. 6542는 1954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했고, 서브마리너가 등장한 것도 1950년대였습니다. 사실상 현재 롤렉스의 주요 라인업이 만들어진 게 바로 이때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여러 신들이 고유의 능력을 갖고 있듯, 이들 역시 각기 다른 기능이 있었습니다. GMT마스터는 두 나라의 시간을 동시에 알 수 있었고, 서브마리너는 세계 최초의 현대식 다이버 시계 중 하나로 꼽히죠. 데이 데이트는 럭셔리 워치로 포지셔닝했고요.
밀가우스는 아주 독특하게 자성을 견딜 수 있는 시계로 과학자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첫 출시 이후 다양한 디자인 변화를 겪었지만, 항자성이라는 기능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죠. 이름 1000(프랑스어로 '밀') 가우스를 견딜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롤렉스는 항자성을 위해 자성에 강한 합금 쉴드 두 개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무브먼트에, 다른 하나는 오이스터 케이스에 고정됐죠.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인 CERN의 테스트를 거쳐 항자성을 인정받기도 했고요.
하지만 밀가우스가 항상 성공가도를 달린 건 아닙니다. 1990년대에 가까워져선 결국 단종까지 됐죠. 약 20년 뒤인 2007년 롤렉스는 Ref. 116400이라는 새 밀가우스를 내놓습니다. 특히 초록색 유리를 사용해 눈길을 끌었는데요, 개발에만 몇 년이 걸렸고 생산도 몇 주가 든다고 합니다.
사실 이 초록 크리스탈이 엄청난 기능을 가진 건 아닙니다. 순전히 미적인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밀가우스 특유의 스토리와 독특한 디자인에 이 초록색 빛이 감도는 유리는, 슈퍼밴드의 제2의 활동을 알리는 찰떡같은 보컬 영입과 같았습니다. ACDC의 본 스콧이 세상을 떠난 뒤, 브라이언 존슨을 데리고 컴백한 느낌이랄까요.
밀가우스가 언제, 어떻게 돌아올진 모르겠습니다. 아주 뜬금없이 빈티지 시계로 돌아올 수도 있고 1980년대 감성이 세상을 지배할 때쯤 나타날 수도 있겠습니다. 어느 셀러브리티가 차고 나오면서 다시 '아는 사람만 아는 시계'처럼 떠오를 수도 있고요. 확실한 건, 언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도 놀랍지 않을 매력적인 시계라는 겁니다. 솔직히 언젠가 제가 손목 위에 밀가우스를 올릴 그날도 빨리 오길 기다려봅니다.
- 레인보우의 Since you`ve been gone을 들으면서 썼습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