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마피게의 로얄오크 스파이더맨
사실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 흔히 '세계 3대 시계 브랜드(해외에선 Holy Trinity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로 불리는 브랜드 중에서도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는 확실히 파텍 필립(Patek Philippe),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보다 젊은 행보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미러볼처럼 폴리싱한 럭셔리 스틸 스포츠 워치 로얄오크가 대표 라인인 것만으로도 많은 게 설명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해 여름엔 새파란 세라믹 로열오크를 보여주더니, 이번엔 스파이더맨 로얄오크를 선보였습니다. 단순히 색 조합이 파란색과 빨간색이라서 대충 스파이더맨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정말로 다이얼에 스파이더맨을 넣었습니다.
오데마피게가 마블과 손을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21년엔 블랙팬서 한정판을 출시했죠. 호딩키(Hodinkee) 인터뷰에서 시계 애호가로도 유명한 전설적인 코미디언 케빈 하트(Kevin Hart)가 극찬하기도 했던 시계입니다.
물론 누군가에겐 유치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블을 안좋아하는 저도 그렇게 큰 울림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대신 다른 설렘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오데마피게라는 최정상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가 우리 시대의 고전이자 아이콘이 될 작품을 다이얼에 담았다는 겁니다.
시계 이야기부터 조금 해볼까요. 이번 '스파이더맨 로얄오크'의 정확한 이름은 'ROYAL OAK CONCEPT "SPIDER-MAN" TOURBILLON'. 레퍼런스는 Ref. 26631IO.OO.D002CA.01 입니다. 250피스만 제작된 한정판 중에서도 한정판이죠. 한 20~30년쯤 지나 필립스 경매같은 곳에 마블 n십주년을 기념해 올라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단연 앞면에서도 훤히 기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스켈레톤 디자인이라는 겁니다. 시계의 정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장치 중 하나인 이스케이프먼트 전체를 회전시켜 중력으로 인한 오차를 줄이는 뚜르비옹(Tourbillon)을 넣어 정확성을 높이면서도 시각적인 만족도를 높였습니다.
스켈레톤 형태로 스파이더맨이 마치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듯한 연출도 가능해졌고요. 이 피규어는 오데마 피게가 탄생한 스위스 르 브라시아(Le Brassus)의 장인들이 최소 50시간 이상씩 작업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케이스는 티타늄으로 제작했습니다. 베젤과 고정 크라운은 모두 세라믹이라고 하는군요. 케이스백과 글래스는 당연하지만 빛반사 처리한 크리스탈입니다. 크기는 42mm. 두께는 14.6mm입니다. 방수는 50m 정도입니다. 스트랩은 블랙과 그레이, 블랙과 레드 두 종류 고무 스트랩을 제공합니다. 버클 역시 티타늄이군요. 사용한 무브먼트는 칼리버 2974로 파워리저브는 72시간입니다.
참고로 블랙 스파이더맨 버전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단 한 점뿐인 이 시계는 18캐럿 화이트골드로 제작했습니다. 화이트골드 케이스엔 거미줄 모양 인그레이빙 장식을 넣고 야광도료를 채웠다고 합니다.
오데마피게는 왜 유독 젊은 행보를 보일까요. 조금 더 정확히는, 왜 그동안 매뉴팩처들이 전통적으로 보여온 관심사를 벗어나 대중문화의 세계와 연결되려는 걸까요. 제 생각에 오데마피게는 시계 업계에서만 박수쳐주는 시계보다는, 현시대가 원하는 시계를 만드는 것을 더 가치있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기술과 완성도에선 장인정신을 잃지 않되, 제품 방향성은 우리 시대를 바라봐야 한다는 거죠.
지난해 12월 오데마피게의 앙리 베나미아스(Henry Bennahmias) CEO가 조선일보와 진행한 인터뷰만 봐도 이런 정신을 암시하는 답변이 많습니다. 10년 전보다 세 배 이상 회사를 성장시킨 그는 '오데마 피게를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한다'며 혈기 왕성하고 과감한 도전정신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현시대의 소비자들과 발맞추는 것을 강조하는 그에게 시대의 아이콘이자 훗날 고전처럼 남을 '마블'을 자신들의 대표 라인에 접목하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오데마피게의 로얄오크 역시 이런 정신으로 등장했으니까요.
끝으로 오데마피게가 이번 시계를 설명하면서 쓴 재밌는 문장을 소개해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이 모델은 오데마피게가 오뜨 오를로지(최정상 시계)의 세계 너머에서 영감을 찾고, 팝 컬처를 비롯한 다른 문화적인 세계와 연결되려는 열망을 구체화한다."
오늘은 비가 와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썼습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