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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안 하는 자식 걱정

오늘도 내 딸은 건강해요

by 물지우개

정확히 분리된 몸뚱이에 저만의 인격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자식은 내 책임이다. 조물주가 주셨는지 삼신 할매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자식은 내가 좋아서, 내 좋자고 내가 낳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건강만 바라던 소싯적 희망은 잊은 지 오래,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10살, 13살의 내 자식들을 보면 저렇게 건강하기만 해도 되는지 걱정이 된다. 인간이 하는 걱정의 94%는 쓸데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오늘도 걱정한다.



한 달 전 13살 딸이 선생님께서 시켰다며 한국사 능력시험 원서접수를 해달라고 했다. 공부는 하고 있냐고 물으니 선생님이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집에서도 한단다. 집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어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딸의 대답에서 약간의 의지가 보여 나는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접수 과정은 번거로웠다. 딸 이름으로 가입을 해야 했고 증명사진 파일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당황한 점은 접수 마감일이 임박해서 양산의 시험장은 모두 마감되었다는 것이었다. 가까운 부산도 마찬가지, 갈 수 있는 시험장은 마산 뿐이었는데 마산까지 가느니 차라리 50분 거리의 해운대가 낫겠다 싶어 해운대에 있는 중학교를 클릭했다. 겨우 장소를 정하고 원서비를 결제했다. 딸이 내 수고를 알아야 조금이라도 공부를 더 하겠지 싶어 나는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그나마 그 시험장도 엄마 덕분에 겨우 들어간 거 알지?”


그 이후도 딸이 시험공부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내가 목격한 장면은 눈을 반짝이며 여자 아이돌 춤추는 영상을 보거나 집이 흔들리도록 육중한 몸으로 춤을 추거나, 거울 앞에서 앞머리에 구루프를 정성스레 감거나, 이마에 난 여드름으로 속상해하는 모습이었다. 내 입만 아프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차마 딸을 보고 시험공부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목젖까지 끓었지만 하지 못했다. 딸은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도서관에서 시험대비 수험서를 대출했으며 이틀 앞두고 기출문제를 풀고 50점이 안된다며 실망 했다. 그러면서 5학년 때 필기한 공책을 꺼내 보며 자기가 필기를 정말 잘해놨다고 감탄했고 이 공책만 쳐다봐도 잘 칠 것 같다고 했다. 참다 참다 나는 이 말을 하고 말았다.


“엄마는 한국사 1급 시험공부할 때 어떻게 한 줄 알아? 3달 동안 매일 인강을 3시간씩 듣고, 보름 전에는 기출문제를 한 회씩 풀면서 왜 틀렸는지 분석했다고. 예상문제 풀 때는 심지어 다 맞힌 적도 있었는데 결국 시험에는 91점밖에 못 받았어.”


실전에 강하다는 딸의 대답에 나는 잔소리를 멈췄다. 딸은 전날까지도 공부는커녕 인터넷으로 기출문제만 풀더니 결국 커트라인 60점을 넘지 못했다. 남편은 그런 딸이 한심한 듯 잔소리를 퍼부으며 고개를 저었고 저렇게 되도록 왜 내버려 두느냐고 나를 타박했다. 실패해 보는 것도 공부라고, 쓴 맛을 보면 정신을 차릴 거라고 말했지만 나도 사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엄마로서 진짜 잘못하는 건 없을까? 탈락하고 나면 딸이 공부의 필요성을 느낄까?’라는 질문에 말이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딸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밝았다. 답지를 제출하기 전에 점수를 계산해봤는데 60점을 넘을 것 같다고 했다. 너는 끝까지 한심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또 참았다. 집에 가면 아마 정답이 인터넷에 뜰 거니까 정확히 매겨보자고 했다. 합격하면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되냐고 묻길래 나는 합격할 리가 없으니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서 정답을 맞혀본 딸은 52점이라며 갑자기 어두워졌다. 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되려 기출문제 결과보다 높다고 신기하다고 했다. 딸은 재수가 좋았으면 합격했을 거라고 아쉬워하자 나는 결국 터지고 말았다.


“공부를 안 했는데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 재수가 없다는 말을 도대체 무슨 낯으로 하냐? 법륜스님이 뭐라 하셨는 줄 알아? 운전을 못하는 사람이 운이 좋아서 운전면허에 합격했어, 그런 사람이 운전을 하고 다닌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지? 공부를 안 한 너는 절반도 못 맞히는 게 당연하지, 운으로 합격한다면 너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시험에 대해, 네가 할 공부에 대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하겠어? 엄마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내 고함에 귀까지 벌건 딸을 보니 살짝 마음이 아파서 공부가 힘들거나 어려우면 엄마가 도와주겠다고 위로했다. 네가 다시 도전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엄마가 책도 사주고 인강도 들을 수 있게 컴퓨터도 허락하겠다고 했다. 딸은 인강을 한번 들어보고 판단하겠다며 틀어달라고 했다. 나도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강의를 찾아 주었다. 나라면 강의를 들으면서 필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를 찾아봤겠지만 딸은 재생한 지 얼마 안 돼서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거의 드러누운 자세를 취하더니 강사 말이 느리다며 1.5배속 버튼을 눌렀다. 차라리 안보는 게 낫겠다 싶어 나는 방에 들어와 버렸다.


작가 은유는 글을 쓰고 여러 권의 책을 내면서 자식의 공부에 조급해하거나 성적으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글을 더 많이 쓰면 공부 안 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눈이 유순해 질까. 나의 학창 시절을 생각해봐도 엄마의 잔소리는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 엄마의 잔소리-딱 한 장면이 기억이 난다. 중1 때였는데 엄마 친구 딸은 전교에서 1등을 했다는데 너는 왜 반에서 1등도 못하냐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절대 반에서 1등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비교의 잔소리는 목적과 반대방향으로 간다는 사실을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한 고1 때도 마찬가지. 담임선생님은 날더러 성적으로는 큰 기대가 없다며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 건강관리를 잘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공부에 몰입했다.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히 보살피는 일이 부모의 의무지만 그 보살핌이 의식주만 걱정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기다리고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지, 얼마큼 개입하고 얼마큼 강제해야 하는지, 아니 자식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엄마는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도와주는 게 옳은지 그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자식도 다르고 엄마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가진 돈도 다르니 잘 안다는 사람을 만나도 나에게 맞는 해답은 없다. 내년이면 딸이 중학생이 되니 나는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다만 내가 엄친딸과 비교하는 폭언은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도 엄마들이 모인 카페에는 자식을 걱정하는 수십 개 글이 올라온다. 성적이 엉망인 자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알려달라는 글, 자식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안 가려고 하는데 진짜 안 보내도 괜찮은지 고민하는 글, 성적으로 한바탕 싸우고 나서 자식이 가출했다는 글, 한 달 학원비와 맞먹는 콘서트 입장권을 사줘야 하느냐고 묻는 글, 어느 동네가 학군이 좋으며, 어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야 하는지, 어느 학원을 다녀야 하는지 궁금한 글은 부지기수다. 나는 댓글이 궁금하다가도 아빠가 모인 카페에도 이런 글이 이만큼 올라오는지 궁금했다.


생각해보면 공부 안 하는 자식 걱정도 건강한 자식을 가진 부모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닌지. 자식을 낳았으니 마음껏 걱정하고, 마음 같지 않더라고 걱정할 자식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지. 서로 아프지 않을 만큼, 정신이 피폐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유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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