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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들, 말을 삼키는 사이

시를 읽다가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by 물지우개

출근하면 8시 18분이다. 여론조사의 플러스, 마이너스 3% 오차처럼 내 출근 시간도 8시 18분에서 더하기 빼기 3분의 오차가 있다. 오늘 교실 문을 열자마자 출근 도장을 찍듯 바라본 디지털시계는 정확히 8시 18분이었다.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른 다음 복도 창문을 열고 교실 창문을 열었다. 어느 날 훅 치고 들어오던 그 감정처럼 가을이 훅 들어왔다. 시린 듯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국화 향을 얹은 바람의 냄새였다.


부팅하자마자 뜨는 창은 교직원이 쓰는 메시지 창이다. 오늘 하루 일정과 행사가 적힌 메시지를 읽고 직원 복무사항, 보고 리스트가 쓰인 첨부파일을 클릭하려다 부장님이 상투적으로(?) 보낸 시를 읽었다.



가기 싫은 수학여행


양산 초등학교 6학년 ◯◯◯


수학여행 갈 때/ 엄마는 준비할 게 많다고

이마트까지 날 델꼬 가신다/ 엄마는 십만 원이나 쓰고

유부초밥도 싸 주시고/ 용돈도 삼만 원이나 주셨다

엄마가 돈 없는 걸 알면서/ 돈 받으니 내가 바보 같다

엄마는 이렇게 힘든데

수학여행 가면 나 혼자만 놀고/ 엄마는 일 가셔야 한다

그냥 수학여행 안 가도 되는데/ 미안하다


시를 읽자마자 나는 울컥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눈을 간질이더니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터져 흘렀다. 드라마는 저절로 펼쳐졌다.



아들! 내일 수학여행가지? 엄마랑 지금 마트 가자.

왜? 뭐 사야 돼?

당연하지.

....

뭘 이렇게 많이 사?

너 속옷도 낡았고 양말도 구멍 났더라. 친구들이 볼 수도 있는데 이참에 넉넉하게 사자. 도시락 쌀 재료도 사고 음료수도 사고, 간식도 사고. 신발도 작잖아. 운동화도 하나 새로 사자.

엄마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냐?

많이 쓰기는, 이럴 때 쓰려고 돈 버는 거지.

....

자, 이건 도시락, 이건 용돈! 아들 많이 못줘서 미안해.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다 와.

무슨 소리야, 이만 원만 줘도 돼. 별로 쓸데도 없어.

친구들 간식 사 먹을 때 너무 사 먹어. 휴게소에서도 사 먹고. 엄마, 일 간다.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


엄마는 하고 싶은 행동, 하고 싶은 말을 아들에게 했지만 아들은 그러지 못했다. 시의 후반부는 아들이 다 하지 못한 말이다. 아들이 엄마의 돈을 걱정해서 결국 수학여행을 포기했다면 반대로 엄마가 시를 썼을까? 엄마가 돈을 기꺼이(?) 쓰고 마음껏 말한 덕분에 아들은 눈물 나는 시를 낳았다.


아들이 삼킨 말, 결국 시가 된 말은 아침 바람처럼 시리면서 따듯했다. 엄마는 엄마라서 아들을 위해 많은 말을 삼킨다고 생각하지만 아들도 엄마만큼 많은 말을 삼키고 산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엄마와 아들만큼 바닷속 빙산 같이 많은 말을 숨기는 사이가 있을까. 내가 아들이 아니라 모르지만 아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에게 말을 숨기는 것 같다. 세상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말은 그만큼 나오지 않은 사람. 말하려다가도 수없이 고민하고, 말을 하려다 삼키는 사람. 차라리 그냥 행行해버리는 사람. 말을 하도 많이 삼킨 탓에 언제부터인가 엄마와 말이 없어지는 사람.



아침부터 눈물을 쏟은 나는 모처럼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하필이면 그림책 제목도 〖엄마 얼굴〗이다. 올챙이는 태어나서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올챙이는 엄마를 찾고 그리워하다 어른이 된다. 자신이 알을 낳고서야 알을 지켜볼 뿐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자신을 비춘 물에서 드디어 엄마 얼굴을 보게 된다.



올챙이와 개구리처럼 아들과 엄마의 사랑은 그리움이 아닐까. 아들은 자라도 엄마가 되지 않고 엄마는 과거에도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워하다 서로를 닮은 얼굴과 생각과 행동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말은 할 수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은.


오늘 집에 가면 아들을 제대로 안아줘야겠다.

아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겠다.

시는 내가 쓰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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