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는 잘 기다리지 못한다. 나처럼 기다림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픈 아이와 병원 가는 길, 나는 오로지 이 생각뿐이다. 제발 병원에 사람이 없기를.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대기하기를. 미용실도 마찬가지. 머리 하는 사람의 뒤통수를 하염없이 봐야 하는 그 기다림이 싫어서 미용실을 안 간 지가 언제인지. 딱 맞춰 등장하는 길거리 붕어빵이나 도넛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면 간절한 달달함도 포기할 수 있다. 나는 놀이공원의 동화 같은 분위기를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같은 이유로 놀이공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기 있는 청룡열차를 타기 위해 2시간을 기다렸다는 딸아이에게 나는 박수를 쳐 주었다. 30초의 무서움을 위해 2시간 동안 기다릴 줄 아는 딸은 정말 기특했으니까.
좋다. 인내심이 그 따위인데 뭘 해내겠냐고? 결과가 백 퍼센트 보장되는 기다림이라면 욕 나오는 표정을 허락한다는 전제하에 충분히 가능하다. 오로지 기다리기만 하면 다 된다면 말이다. 나는 친구들보다 결혼을 빨리 했지만 아이는 빨리 갖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원할 때 얼마든지 임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동안 결혼 초의 피임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확신도 없고 끝도 없는 그 기다림이 나를 우울하고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노력이 다가올 결과에 미칠 영향력이 아주 적거나 거의 없을 때는 사실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 지켜보고 참는 수밖에 없다. 팔딱거려봐야 아무 득이 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내 직업은 기다림의 수련이다.
오늘도 내가 기다려야 하는 어린이-의자를 까딱까딱 흔들며 소음을 내는 어린이, 친구가 발표할 때 대 놓고 비웃는 어린이, 모두가 생각하는 동안 자기가 먼저 답을 크게 말하는 어린이, 교실에서 위협적으로 달리는 어린이, 블록을 가지고 놀다가 고함을 지르거나 블록으로 친구 머리를 치는 어린이, 수업시간이 되어도 자기 자리에 앉기는커녕 친구와 수다를 멈추지 않는 어린이, 하루 종일 엎드려 있거나 내가 가서 책을 펴 주어도 연필 한번 잡지 않는 어린이, 내가 그림책을 읽는 동안 친구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듬으며 깔깔 웃는 어린이, 연필로 친구를 찌르거나 연필을 돌리다가 날리는 어린이-는 참 많았다. 친절하게 타이를 때도 있고 눈에 힘을 주고 나무랄 때도 있지만 내 영향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지금은 내 기다림을 박박 긁어모아야 하는 어린이일지라도 어떻게 자랄지 아무도 모른다. 부모에게는 세상 귀한 자식이라는 사실도 물론. 고로 나는 기다릴 뿐이다. 교사가 하는 일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산을 옮기기 위해 작은 돌멩이 하나부터 옮기듯 어린이의 가능성을 믿고 기다릴 뿐이다. '화 내기, 벌 주기, 내 권위에 좌절하기, 내 능력을 불신하기'는 작은 돌멩이는커녕 털끝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기다림이 힘들다. 결과가 뻔한 기다림도 쉽지 않다고 이미 고백했듯이 결과를 알 수 없는 기다림은 아무래도 어렵다. 기다림이 어려워 나는 요즘 자주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선생님은 기다리고 있어. 너희가 준비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게. 특정 어린이에게도 말한다. 우리 서로 좋아하잖아(좋아해야만 하잖아). 서로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자. 네가 날 진짜 좋아할 때까지 기다릴게. 네가 내 말에 집중할 때까지 기다릴게.
어린이가 더하기, 빼기를 잘 못하거나 글을 잘 못쓰거나 발표를 잘 못하거나 그림을 못 그려도 어차피 잘할 수 없고 또 다른 재능은 분명히 있으니 교사는 그냥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못했는데 잘했다고 거짓말은 할 수 없으니 나는 ‘수고했어’나 ‘고생했어’라고 말할 뿐. 볼썽사납게 화를 나고 소리를 지르는 날도 있다. 우아하게 기다리다가 참지 못해 옆반에 들릴 정도로 팔딱거려도 문제 행동이 고쳐지지 않으면 나는 차라리 고개를 돌린다. 내 기다림에 사망 선고하듯 백기를 든다. 나 이제 안 기다릴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출근하다 본 아들 방에는 뒤집힌 양말이 구석에서 뒹굴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딱지가 펼쳐져 있었다. 딸은 아까부터 계속 입을 옷만 고르고 있고 지가 먹은 그릇은 치울 생각이 없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말없이 그저 쳐다만 보았으니까.
기다리지 못하는 내가 기다림이 본질인 이 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정말 내 일이 맞는지 모르겠다. 기다리기만 하는 되는 이 일이 얼마나 편하냐고, 호강에 겨워 요강에 뭐 싼다고 반문한다면 할 말 없다. (마흔에 적성 운운하는 것이 웃기지만) 확실한 것은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다리지 못하고, 기다리기 싫어하는 나는 희한하게도 기다림이 거룩하니까. 특히 결과를 알 수 없는 하염없는 기다림을 존경하니까. 실종된 딸을 기다리는 아빠. 주인을 기다리는 유기견. 북쪽 가족을 기다리는 실향민, 씨앗을 심으며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 먼바다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 하늘나라에서 만날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기다림은 숭고하다. 내 기다림은 쉽게 바닥이 보이는 하찮은 정도지만 내 직업의 본질인 기다림도 결과를 알 수 없으니 분명 근사한 기다림이다. 나는 도무지 이 기다림을 포기할 재간이 없다. 너무 근사하니까.
암흑 같은 결과를 빛처럼 믿으며 나는 잘 기다리고 싶다. 물 줄 때를 기다리는 내 책상 위 애플민트처럼 , 먹이를 기다리는 저 열대어처럼 바보 같아 보여도 실은 고수처럼. 하염없이 우아하게 기다리고 싶다.